간접 경험의 즐거움

뜻을 이루고자 한 숭고한 인내와 열정 '도리화가'

새 날 2016. 5. 30. 15:51
반응형

어릴적 부모를 여의고 기생집에 얹혀 살게 된 진채선(수지)은 우연히 판소리 학동들의 배움터라 불리는 동리정사의 수장 신재효(류승룡)를 만나게 되면서부터 소리꾼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을 품게 되고, 이후 자신도 훌륭한 소리꾼이 되기로 마음을 굳힌다. 그녀의 소리를 향한 열정은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다. 동리정사에서 소리를 배우는 학동들을 담장 너머로 몰래 엿보거나 그들의 소리를 따라하며 의지를 불태우곤 하던 그녀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여성들에게는 그야말로 암울함 그 자체였다. 물론 여성을 향한 차별이 비단 판소리뿐이겠냐만, 어쨌거나 어떠한 경우라 해도 여성의 신분으로 판소리를 하는 건 용납되지 않을 뿐 아니라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처지였다. 이는 일종의 사회적 금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선은 남장을 한 채 자신의 신분을 속여가며 동리정사에 들어가 꿈을 이루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처음에는 완강하게 거부하던 신재효조차 그녀의 눈물겨운 노력과 남다른 자질에 승복하게 되고, 결국 그녀를 소리꾼으로 키우기로 결심한다. 진채선은 과연 금기를 깨고 조선 최초의 여성 소리꾼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판소리는 민초들의 고단한 삶이 고스란히 담긴 전통 예술 장르다. 이는 서민의 애환을 달래고 위정자나 양반들의 허위 의식을 신랄하게 비트는 장이 되게 해주며, 각종 풍자로 민초들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해주던 민중 예술이다. 소리꾼과 구경꾼이 함께 추임새를 내지르며 어우러지는 모습은 마치 민초들의 삶 그 자체를 보여주는 듯싶다.



때로는 배꼽 빠지게 할 정도로 웃게 하다가도 어느새 애절함으로 눈시울을 붉게 만들어 눈물을 뚝뚝 떨구게도 한다. 신재효는 이렇듯 판소리를 통해 민초들에게 위안을 준다는 측면에서 안분지족의 삶을 누리고 있는 와중이며, 그의 문하생이 되기로 자처한 진채선 역시 판소리와 스승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던 터다. 하지만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판소리와 청아한(?) 아이돌 이미지의 수지가 잘 매치되지 않아 왠지 영화는 자꾸만 겉도는 느낌을 준다. 이 작품을 위해 1년 동안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소식은 익히 들어 알고 있으나 수지의 타고난 목소리는 절대로 판소리의 그것과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다. 게다가 어설픈 연기력까지 더해지니 몰입을 방해하는 결정적인 요소로 다가온다. 

 

 

그 때문인지 진채선이 여성의 신분으로 소리꾼에 도전하는 과정과 이후 신재효가 그녀를 자신의 문하생으로 받아들이고 본격 훈련하는 모습이 주를 이루는 전반부는 많이 지루한 감이 있다. 대원군(김남길)의 서슬 퍼렇던 권력이 신재효와 진채선의 삶에 한층 가까이 다가오며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후반부에 들어서야 영화는 비소로 흥미진진해지기 시작한다.

 

진채선의 신재효를 향한 감정은 딱히 드러난 것도 아닌데다 그렇다고 하여 꼭꼭 감춰둔 것도 아닌 까닭에 애정인지 존경심의 발로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게 한다. 진채선이 소리를 제대로 내기 위해 앞서 언급한 감정을 이입하고 가다듬는 장면은 그래서 더없이 황망하다. 감초 역할을 톡톡히한 송새벽의 연기가 그나마 극의 분위기를 살리는 일등공신이다. 흥선대원군 역의 김남길 역시 강렬한 카리스마를 내뿜으며 살벌한 권좌의 본질을 잘 보여줘 제 역할을 톡톡히한다.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판소리의 아성에 여성이 도전한다는 건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땐 너무 무모하기도 하거니와 일종의 목숨을 건 행동과 다름없다. 진채선이 최초의 여성 소리꾼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건 우선 그녀의 지칠 줄 모르는 집념과 투지 그리고 근성 따위가 한 몫 단단히 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녀와 신재효의 운명을 틀어쥔 채 쥐락펴락했던 흥선대원군의 역할을 무시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그는 귀명창으로, 유독 판소리에 조예가 깊은 인물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저잣거리에서 우연히 닿은 신재효와 대원군의 인연이 결국 나비효과가 되어 그들의 삶의 향방을 결정 짓게 만든 셈이다. 

 

 

스크린 위로 드문드문 드러나는 우리 산하의 곱디고운 자태와 경복궁 경회루에서 펼쳐지는 판소리 경연 장면은 마치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뛰어난 영상미는 그나마 이 영화의 가장 큰 위안거리 중 하나다. 무언가에 최선을 다한다는 건 단순히 열과 성을 다하기보다 목숨까지 내놓을 만큼 절박하고도 처절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그러한 성질의 것이 아닐까? 때문에 이 영화는 최초의 여성 소리꾼이라는, 반드시 무언가 수식어를 붙여 기억해야만 하는 우리네의 보편적인 정서를 한 차원 넘어, 소리와 진정한 사랑에 미쳐 이를 이루고자 목숨까지 걸었던 우직한 한 사람의 숭고한 인내와 열정 따위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감독  이종필

 

* 이미지 출처 : 다음영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