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트릭'

새 날 2016. 7. 14.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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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쓰레기 만두 파동' 사건을 터뜨리며 방송가에서 승승장구하던 PD 석진(이정진)은 해당 사건이 거짓 보도로 판명나고 사회적 물의를 빚게 되자 조용히 일선에서 물러난다. 얼마 후 해당 방송국에는 낙하산 사장이 임명되고, 방송국 앞에서는 연일 사장 물러나라는 시위가 진행되고 있다. 무언가 자신의 입지를 다질 기회가 절실했던 사장이다. 화려한 이력을 소유한 석진이 그의 도우미로 적임자였다. 교양국 다큐멘터리 제작을 통해 이른바 대박을 터뜨리게 될 경우 석진은 과거의 영예를 되찾을 수 있게 될 테고, 자신 역시 이를 기화로 객관적인 능력을 인정 받게 될 테니 이보다 좋은 거래도 사실 드물 듯싶다. 


결국 다큐멘터리 대상은 6개월의 시한부 삶을 살아가는 폐암 환자 도준(김태훈)과 그의 아내 영애(강예원)로 낙점됐고, 그들의 병상일기는 석준의 노련한 연출력과 미친 듯한 설정 등 개인기마저 더해지며 시청률을 한껏 치솟게 만든다. 병세가 갈수록 악화되어가는 도준의 안위는 아랑곳없이 오로지 시청률에만 사활을 건 석진의 무리수는 점차 일정한 선을 넘어서며 광기로 치닫는데... 



시청률에 목 매는 방송국의 오랜 관행과 생리는 사실 어제 오늘만의 얘기가 아니다. 정도와 사례만 다를 뿐, 시청률을 끌어올려야 함은 방송 관련 매체라면 누구든 벗어날 수 없는 일종의 지상과제다. 때문에 지금 이 시각에도 우리가 모르는 취재 현장에서는 영화 내용과 유사한 방식의 행태가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단순히 허구로만 받아들이기엔 찜찜한 구석이 제법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도준 부부의 다큐멘터리는 영화 초반부만 해도 사실 잠깐 등장한 뒤 이내 곧 사라질 정도의 가벼운 소재인 줄로만 알았다. 무척 단순한 내용이었기에 조금 더 복잡하고 그럴듯한 무언가가 등장할 줄 알았다. 하지만 병상일기라는 매우 사실적인 내용을 담은 다큐멘터리이다 보니 오히려 극적인 변화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로는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집요하다 못해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도준 부부의 사적 영역 깊숙이 발을 들여놓으며 그들의 삶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치는 석진이다. 



다큐멘터리는 처음의 순수했던 의도와는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애초 설정해 놓은 시청률 목표치에 걸맞게 그 내용이 변모해갔다. 심지어 사람의 목숨까지 흥정 대상이 될 정도였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만큼 주도면밀했던 사람이 다름아닌 석진이다.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보다 자극적인 소재를 일부러 끼워넣어가며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바쁜 그다. 석진의 욕망이 커져가면 갈수록 그의 반대급부로 그나마 남아있던 도준의 희망은 되레 점점 사라져가는, 정말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석진의 무리수를 멈출 방법은 진정 없는 걸까? 오히려 사장이 승진을 미끼로 시청률을 내걸은 판국이니 적어도 방송국 내부에서 그의 비윤리적인 행위에 대해 이를 제지할 수단은 없는 셈이다. 물론 함께 작업을 하던 동료나 외부에서 석진을 돕는 조력자들조차 그의 도를 넘어선 폭주에 반기를 들거나 태클을 걸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아울러 그와 한솥밥을 먹던 보도국장이 석진에게 던진 뼈 있는 한 마디는 일종의 경고신호로 다가올 법도 하다. 하지만 직무적으로 혹은 직무 외적으로 모든 요소를 장악한 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그의 행위를 멈출 용기 있는 자는 단언컨대 그의 주변에는 없다. 


석진의 얄미운 어투와 표정은 그에 대한 반감을 키우는 요소로 작용한다. 그 중에서도 그를 더욱 밉살스럽게 다가오도록 하는 대목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자신이 규정하고 있는 틀의 범주에 짜맞춘 채 이를 그의 방법으로 재차 확인하려는 시도 아니었나 싶다. 천연덕스럽게 비꼬거나 비웃으면서 심경을 되묻는 그의 표정으로부터는 죄책감 따위라곤 전혀 읽히지 않는다. 



시한부 인생의 도준으로 분한 김태훈의 연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시종일관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연극할(?) 줄 아는 여성으로 등장, 도준의 병 수발부터 흡사 방송을 즐기는 듯한 묘한 내면의 연기까지, 다양한 면모를 선보인 영애 역의 강예원의 연기력도 손색이 없다. 석진과 찰떡궁합의 호흡을 맞추던 장윤정은 스크린에서 본 건 처음인 것 같다. 물론 TV에서도 언제쯤 보았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세월을 비껴갈 수는 없었는지 이젠 제법 연륜마저 느껴지는 외모다. 물론 미스코리아로서의 위엄은 여전하지만 말이다.



그동안 시청률 지상주의를 고발한 영화는, '나이트크롤러' 등 그 종류가 제법 된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그들과 어떻게 차별화될까? 우리는 '트릭'이라는 영화 제목 속에서 그와 관련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과연 누가 누구를 속이려 하고 속는 것이며, 또한 누가 누구를 이용하고 이용 당하는 것인지, 가해자와 피해자가 따로 없는 온통 혼란스럽고 모든 게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도 결국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몹시도 씁쓸한 현실을 곱씹게 하는 작품이다.



감독  이창열


* 이미지 출처 :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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