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하트 오브 더 씨> 탐욕과 믿음, 진실에 관한 이야기

새 날 2015. 12. 4.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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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석유가 발견되기 전인 1800년대 초, 고래의 기름은 등불을 밝히는 용도로 값지게 활용돼 오고 있었다. 에식스호는 고래 기름 200통을 확보하기 위해 바다에 띄워진 포경선이다. 큰 향유고래 한 마리로부터는 대략 50통 가량의 기름을 뽑을 수 있었으니 이 정도의 목표를 위해선 적어도 큰 고래 네댓 마리는 잡아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나 시작은 좋지 않았다. 에식스호는 많은 이들의 기대와 축복을 한 몸에 받으며 출항하였건만, 며칠 지나지 않아 돌풍을 만나게 되고, 선원 일부가 죽거나 배가 심하게 파손되는 탓에 출항지인 낸터컷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처지가 됐다.

 

하지만 일등항해사인 오웬 체이스(크리스 헴스워스)의 설득으로 항해는 계속됐고, 그 덕분에 고래 한 마리를 포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고래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게 된다. 결국 대양 이곳 저곳을 넘나들며 남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수천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하염없이 에식스호를 몰고 가던 그들은 마침내 고래의 서식지를 발견하고는 환호성을 내지르게 된다. 달뜬 마음을 추스릴 새도 없이 작은 배에 나눠 타고 본격 고래 사냥에 나선 그들이지만, 이번 고래는 왠지 호락호락하지가 않은 모양새다. 사람을 공격해 왔기 때문이다. 결국 적어도 몸 길이가 30미터는 됨직한 흰 고래에 의해 그들이 타고 온 포경선 에식스호는 산산조각나 버리고, 선원들마저 뿔뿔이 흩어져 작은 보트 3대에 나눠진 채 기약 없는 조난 생활이 시작되는데...

 

 

1820년에 실제로 일어났던 미국의 포경선 에식스호의 조난을 둘러싼 너새니얼 필브릭의 논픽션 '바다 한가운데서'가 이 영화의 원작이다. 해당 도서는 타임지 선정 2000년 최우수 논픽션과 전미도서상 선정 2000년 최우수 논픽션을 수상할 만큼 기록문학으로서의 완성도를 인정 받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모비딕'을 쓴 작가 허먼 멜빌이, 과거 14세의 어린 나이로 에식스호에 탔다가 우여곡절 끝에 살아 돌아 온 한 선원을 찾은 끝에 그로부터 에식스호와 관련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모비딕'의 소재로 삼았다는 내용이 이 영화 속에서도 등장하고 있듯, 실제로 소설 '모비딕'의 상당 부분이 이 에식스호의 이야기로부터 모티프를 취한 것이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동력이라곤 단지 바람을 이용하는 방법밖에 없었던 당시 포경선은 돛을 펼쳐 바람의 힘을 빌려 이동해야 했다. 배 한 척을 띄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땀방울을 필요로 했던 것인지 이 영화는 에식스호 요소요소에서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생생한 모습을 통해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갑판 위에서 쉴 새 없이 왔다 갔다 하는 선원들로부터는 마치 갓 잡아 올려진 생선과도 같은 생동감이 묻어나오고 있었으며, 장엄한 바다 한복판에 떠 있는 에식스호는 흡사 한 폭의 그림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물론 에식스호가 비록 망망대해에 떠 있는 작은 배에 불과했지만, 어쨌거나 이곳도 수십명이라는 선원이 함께하는 엄연한 사람 사는 곳인 탓에 여지없이 갈등은 빚어지고 있다. 갈등의 주체는 다름아닌 선장과 일등항해사의 양자 구도다. 선주와 투자자들이 임명한 에식스호의 선장은 일종의 낙하산 인사였으며, 재산 등 뒷 배경이 매우 탄탄한 금수저 출신이기도 하다.

 

반면 어느 모로 보나, 특히 과거 선주와 투자자들과의 약속도 있었기에, 자신이 에식스호의 선장으로 임명될 것이라 철석 같이 믿고 있던 체이스였건만, 또 다시 일등항해사로의 낙점은 그를 크게 실망시키고도 남는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체이스는 직접 포경선을 타며 고래를 잡아 온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모두 경험한 배테랑 중에서도 초일류 배테랑인 탓이다. 선주나 투자자들 역시 이를 인정하고는 있으나 당시 사회 분위기가 지위나 재산 등의 배경이 실력보다 더욱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여졌던 터라 체이스라고 하여 이러한 결정을 딱히 피해 갈 수는 없었다.



현장에서의 경험이 전무한 까닭에 현실 감각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선장과, 경험 및 실력으로 무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등항해사에 머물고 있는 체이스는 사사건건 충돌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실력이 부족한 사람은 흔히 이를 만회하기 위해 쓸 데 없는 자존심을 내세우기 십상이다. 선장의 자존심과 오기는 배를 산으로 보내 버리거나 좌초시키기에 충분할 만큼 곤두 서 있는 상태다. 날카로웠다. 그가 부린 억지로 인해 돌풍 피해를 입어 자칫 배가 좌초될 뻔한 사건에 대해서도 선장은 외려 일등항해사의 탓으로 돌리는 등 두 사람의 신경전은 끝이 없다.

 

애초 두 사람의 운명은 출신 성분이 워낙 극명하게 차이 나는 데다, 성장 과정 그리고 한 배를 타게 된 각기 다른 배경 때문에라도 어차피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 처지이긴 하나, 이렇듯 각자 꿈꾸고 있는 바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걷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고래 포획이라는 목표만큼은 공통의 지향점이 분명하였기에 이를 통한 의기투합이 가능했다.

 

 

성공과 돈에 방점이 찍힌 두 사람의 의기투합은 어느덧 헛된 욕망으로 자라나기 시작하였고, 이를 좇느라 에식스호를 망망대해에서 하염없이 표류하게 만들었으며, 아울러 그들을 따를 수밖에 없는 여타 선원들과 함께 결국 대자연 앞에서의 인간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가를 온몸으로 체득하도록 만드는 매개 역할을 톡톡히한다.

 

이른바 흰 고래로 알려진 바다 괴물은 그들이 그동안 접해 왔던 고래들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굉장히 영악하였으며 포악하기까지 했다. 에식스 선원들을 바다 위에서 조난 당하게 만든 뒤에도 끊임없이 그들의 뒤를 쫓으며 괴롭혔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돈으로 보였던 고래가 어느덧 공포의 대상이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은 셈이다. 이들이 겪게 될 고초는 미지의 세계와 대자연에 대한 경외감보다는 오로지 돈이라는 세속적 욕망에 사로잡힌 채 바다 그리고 고래와 사투를 벌여 온 인간들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조난을 당한 채 수십일 이상을 바다 한가운데에서 배고픔 및 절망 등과 싸우며 실낱 같은 희망을 부여안은 채 목숨을 부지했던 선원들은 결국 극한 상황으로 내몰려, 오로지 생존 그 자체만을 위해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충격적인 행동 양식을 보이거나 평소라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결정을 반복하며 인간 이하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이러한 상황에서 체이스의 행동은 유난히 돋보인다. 그는 동료와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으며 끝끝내 신의를 지켜 여러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고, 오로지 돈밖에 모르는 선주나 지역 유지들의 강한 회유에도 불구하고, 이에 굴복하지 않은 채 자신의 신념과 의지대로, 더 나아가 주변인들에게까지 올곧은 진실이 확산될 수 있도록 일관된 행동을 보여 주고 있다.

 

영화 종영 무렵 슬쩍 언급되고 있지만, 오롯이 기름을 얻기 위한 포경 산업은 아마도 땅 속에서 석유가 발견될 무렵부터 본격 쇠퇴기를 맞지 않았을까 싶다. 이 영화는 외견상 해양 재난 블록버스터를 표방하고 있으나, 그보다는 인간의 밑도 끝도 없는 탐욕과 믿음 그리고 진실 따위를 말하려 하고 있는 것 같다. 바다에 맞선 인간 군상의 나약함을 빗대어 점차 옅어져가는 인간성의 회복을 바랐는지도 모른다. 웅장한 대자연, 아울러 그와 사투를 벌이는 한낱 티끌에 불과한 사람들의 처절함을 맛볼 수 있음은 덤이다.

 

 

감독  론 하워드

 

* 이미지 출처 :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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