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때아닌 이념 갈등, 누가 부추기는가

새 날 2015. 10. 14.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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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와 새누리당이 강행한 역사 교과서 국정화로 우리 사회가 때아닌 이념 전쟁에 휘말리고 있는 양상이다. 13일 여의도역에서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와 도종환 의원 등 지도부 및 당직자들이 '친일독재미화 국정교과서 대국민 서명운동'을 진행하던 도중 어버이연합 등 자칭 보수단체 회원들이 욕설과 삿대질을 하며 행사장에 난입하여 일대를 난장판으로 만들어놓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욕설과 고함 등의 험악한 분위기 때문에 결국 이날 서명운동 참가자들은 행사장에서 일찌감치 철수할 수밖에 없었단다. 어버이연합 등의 회원이 들고 있는 피켓엔 "김일성 주체사상 가르치는 역사왜곡교과서 OUT" 등이 쓰여있었다.

 

그에 앞서 지난 12일 정부의 국정화 강행 발표가 있던 날 대학생 18명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를 주장하며 기습 시위를 벌인 바 있으며, 이들 모두는 경찰에 연행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여학생 한 명이 부상을 입어 병원으로 후송되기도 했다는 전언이다.

 

ⓒ오마이뉴스

 

봇물을 이루는 국민들의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여권이 이를 무시한 채 일방독주를 시도한 상황, 이에 야권이 정파를 뛰어넘는 단일대오를 형성하고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친일·독재 미화 시도로 규정, 공동 대응에 나서기로 했다.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와 정의당 심상정 대표는 13일 오전 국회에서 회동을 열고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선거제도, 노동개혁 등 현안에 대한 공동대응을 합의했다. 15일 신당 창당을 선언한 무소속 천정배 의원과의 연대 움직임도 포착되는 상황이다. 이렇듯 야권은 모처럼 같은 이슈로 한데 뭉친 채 국회 보이콧, 장외투쟁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투쟁에 나서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학계의 움직임도 심상찮다. 주요 역사학회와 대학 내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정부의 국정교과서 집필진에 참여하지 않겠노라는 이른바 집단 보이콧 선언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13일에는 연세대학교 사학과 교수 전원이 향후 국정교과서 집필을 거부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하였으며, 서울대와 고려대 등 일부 학교에서는 학생들 또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며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싼 반발 여론이 대학가로까지 거세게 옮겨붙고 있는 양상이다.



물론 국정화를 찬성하는 측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어버이연합과 엄마부대 등 자칭 보수단체가 국정화 반대 집회 등에 몰려와 물리력을 행사하여 집회를 원천적으로 못하도록 훼방을 놓거나 자체적인 집회를 통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아울러 일부 대학생 단체를 비롯한 보수 성향의 시민단체는 국정화 강행이라는 정부의 방침을 지지하는 1인 시위와 기자회견 등을 잇달아 개최하며 작금의 이념 전쟁에 맞불을 놓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 사회가 역사 교과서를 둘러싸고 또 한 차례 극심한 이념 갈등을 겪으며 양 갈래로 찢어지고 있는 양상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미국 방문길에 오르면서 정쟁과 이념대립으로 국론을 분열시켜선 안 된다고 언급했다. 국정화 강행 이후 격해지고 있는 이념 갈등을 두고 한 말일 테다. 그동안 역사전쟁을 물밑에서 진두지휘해 왔으면서도 이에 대해 단 한 마디 언급조차 않다가 국정화를 강행한 뒤 곧바로 이어진 미국 방문길에 앞서 이에 대해 처음으로 공식 입장을 내놓은 셈이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 대통령 본인 때문에 발생한 이념 갈등에 대해 그래선 안 된다는 말 한 마디만 남긴 채 정작 자신은 자리를 비우고 만 황당한 경우가 아닌가. 또 다시 유체이탈 화법을 꺼내든 셈이다.

 

10월 들어 정부와 여당이 느닷없이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추진한다며 그의 수단으로 꺼내든 건 다름아닌 종북몰이였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최고위원회의에서 국정화는 아이들에게 김일성 주체사상 가르치게 하는 것을 바꾸자는 도구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다. 심지어 새누리당은 당 차원에서 '김일성 주체사상을 우리 아이들이 배우고 있다'는 내용이 담긴 플래카드를 제작하여 전국 곳곳에 붙여놓은 채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현재 우리 아이들이 배우고 있는 역사책은 온통 김일성 주체 사상과 같은 불온사상으로 가득하다는 얘기가 되는 게 아닌가. 제아무리 정치적인 이득 때문에 눈이 멀어도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할 수 있는 걸까?

 

ⓒ경향신문

 

남과 북으로 갈린 한반도의 정치사회 지형상 진보와 보수라는 이념적 갈등은 필연적인 요소다. 아울러 때로는 이러한 갈등과 반목이 약간의 긴장감을 형성하며 오히려 사회의 발전과 진보를 이루는 토대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일정 수위가 보장됐을 때의 얘기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념과 정치적인 잇속 때문에 되레 이념 갈등을 역이용하는 건 어느 모로 보나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그동안 비슷한 경험을 숱하게 겪어오면서도 전혀 반성의 기미조차 없는 건 뼛속 깊이 물들어있는 그들 본래의 몹쓸 성향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셈이 아닐까 싶다.

 

우리 사회에서 '종북'이 무얼 의미하는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너무도 뻔한 사실이다. 결국 국민 여론을 등에 업지 못해 추진 원동력이 미흡하다 보니 무리수가 필요했던 셈이고, 다름아닌 그 무리수란 게 또 다시 '종북'이라는 색깔 논쟁의 형태로 발현된 것일 테다. 이념 대립으로 국론을 분열시켜서는 안 된다는 대통령의 발언엔 심히 공감한다. 하지만 국민 여론에 반하는 자신의 신념 하나를 밀어붙이기 위한 방식으로 이념 갈등을 꺼내들어 우리 사회를 또 다시 보혁 논쟁의 불구덩이로 몰아넣은 채 정작 본인은 그래선 안 된다는 원론적인 한 마디만 남기고 미국으로 훌쩍 떠나버렸으니 설득력이 있을 수 있을까? 작금의 때아닌 이념 갈등, 과연 누가 부추기고 있는 걸까? 아무리 고개를 갸웃거려 봐도 답은 너무도 뻔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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