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자기모순에 빠진 '국정화', 과연 안착 가능한가

새 날 2015. 10. 18.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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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유철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지난 15일 의총 모두 발언을 통해 "현 역사교과서 집필진 80% 이상이 전교조와 좌익세력"이라고 말했다. 이의 근거는 검정제 도입 이후 출간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집필진을 새누리당이 자체 분석한 결과 64%가 진보좌파에 해당한다는 성향 분류 결과와, 현대사 단원의 경우 80%가 넘는 집필진이 같은 성향을 보이고 있다는 데서 비롯됐다. 이는 김무성 대표의 "좌파적 세계관에 입각해 학생들에게 민중혁명을 가르치는 것"이라거나 "학생들이 왜 주체사상을 배워야 하는가" 따위의 발언과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 아이들이 주체사상을 배우고 있습니다"라는 눈에 번쩍 뜨일 만한 새누리당의 플래카드는 국정화를 밀어붙이기 위해 꺼내든 논리적 배경의 화룡점정이다.

 

그렇다면 저들의 주장이 모두 옳다고 가정해보자. 물론 실제로 그럴 리는 추호도 없다. 주체사상을 가르쳐온 전국의 교사들은 국가 체제를 위협하는 불온한 사상을 전파한 셈이 되고, 이를 배운 우리 아이들 역시 몹쓸 사상을 그들로부터 학습한 뒤 시험까지 치러가며 달달 외울 정도로 열심히 공부를 한 격일 테니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을까? 학교 전체가 그 무시무시하다는 볼온사상으로 잔뜩 물든 게 아닌가. 더구나 교육 행정을 총괄하는 교육부장관은 그동안 이를 알면서도 방조하고 묵과해온 셈이니 지금 당장이라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여부를 조사해야 하는 게 아닐까? 행정부의 수반이자 국정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은 또 어떠한가.

 

ⓒ뉴시스

 

하지만 중이 제 머리를 깎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이를 확인하기 위해 한국청년연대 등의 청년학생단체와 전교조가 김무성 대표, 원유철 원내대표 등에 대해 고발 고소 조치하였으니, 향후 추이를 조금은 느긋하게 지켜보자. 왜냐하면 18대 대선의 불법 여부에 대한 판결조차 아직까지 나오지 않고 있는 마당에 누군가에겐 지극히 정치적인 사안에 해당할 이번 건에 대해 우리 사법부로부터 빠른 판결을 바란다는 건 지극히 어려운 설정일 테니 말이다. 어쨌거나 저들의 주장이 옳은 건지 그렇지 않으면 새빨간 거짓말인지의 여부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밝혀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하지 않겠는가? 

 

물론 그와 관련한 정답은 이미 나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교육부는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강행 사유로,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검정 교과서의 이념 편향성을 들고 나왔지만, 정작 지난해에는 같은 교과서에 대해 "올바른 역사관 형성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정반대의 입장을 내비친 바 있다. 2014년 1월에 내놓은 교육부의 보도자료에 따르면 한국사 교과서 8종의 오류와 서술 내용 2,250건을 수정해 승인했다고 밝히면서 학생들의 올바른 역사 인식 형성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힌 바 있다.

 

현행 8종의 고교 한국사 교과서는 박근혜 정부의 연장선인 이명박 정부 당시 만들어진 교육 과정과 집필 기준을 철저히 따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제도라거나 좌편향, 심지어 주체사상을 가르치고 있노라고 몰아붙이며 철저하게 자기 부정에 나선 이번 정부다. 현재의 검인정 제도는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 도입된 국정 교과서에 따른 획일적 교육의 폐해를 개선하기 위해 김영삼 정부가 채택한 제도이다. 이후 현행 검인정 체제 교과서의 토대가 될 교육 과정과 집필 기준은 이명박 정부 당시 만들어진 것이기에 작금의 국정화 강행은 결국 이 모두를 부정하는 자기 모순적 태도의 전형이 되는 셈이다.



한편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은 "국정을 영원히 하자는 것은 아니다. 일단 국론을 정렬해야 한다"며 검인정과 자유발행 체제를 지향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 분명한 태도로 인정한 바 있다. 하지만 이게 무슨 궤변인가 모르겠다. 검인정과 자유발행 체제가 옳다는 걸 알면서도 국론 정렬을 위해 국정화를 강행한다? 그렇다면 국정화 강행과 동시에 국론 정렬은커녕 국론이 이념에 의해 정확히 둘로 분열된 채 사회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고 있는 상황은 어떻게 설명할 텐가? 그렇다면 진작부터 이런 결과가 예견됐음에도 국정화 강행에 나섰다는 건 그 이면으로 다른 노림수를 숨겨놓고 있노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주요 외신들의 다소 삐딱하거나 냉소적인 태도의 보도는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어이없으며 황당한 것인가를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잣대 역할을 한다. 박근혜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에 대한 주요 외신들의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남한이 역사교과서 통제에 나선다' 라고 하거나 '정부의 조치가 학계와 야당의 격렬한 비판을 불렀다'는 식의 보도 일색이다. 보수 일변도의 박근혜 정부가 교육마저 과거 권위주의적 시대로 되돌리고 있노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유엔 역시 그동안 단일 역사 교과서의 문제점을 여러 차례 보고서를 통해 지적하며 다양한 교과서 발행을 각국에 권고해온 바 있다. 특히 대표적인 국정체제 국가인 베트남에 대한 보고서를 통해서는 "단일 역사 교과서는 정치적으로 이용될 위험이 크다. 역사에서 단 한개의 객관적 사실만 존재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하여 시민단체인 참여연대가 유엔 문화권 특별보고관에게 우리의 국정화 강행 상황에 대해 긴급청원을 제출한 상황이다. 유엔 특별보고관 긴급청원제도는 인권침해 사례 발생을 전달받은 유엔 특별보고관이 베트남 정부에 행하듯 해당 정부에 서한을 보내 이를 중단할 것을 요청할 수 있다. 정부의 무리수가 결국 대한민국 사회를 국격 추락이라는 딱한 처지로까지 내몰고 있는 셈이다.

 

아울러 정부의 입장을 대변한답시고 국정화 찬성 의견을 내놓은 인물들의 면면과 수준은 작금의 상황이 비극을 넘어 얼마나 희극적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지지하는 교수 모임 소속 교수들은 16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정화 결정에 찬성하노라며 한 목소리를 냈다. 이름을 내건 이들은 모두 102명에 달한다. 이들 대부분은 역사와는 그다지 관련이 없는 인물들인 데다, 뉴라이트 학파 계열이 다수를 이룬다. 특히 얼마 전 이른바 일베 교수로 이름을 널리 알린 모 교수도 102인의 명단에 포함돼 있어 눈길을 끈다. (국정화 추진 동조자 명단)

 

 

이런 상황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학계와 교육현장의 움직임은 더욱 기민해지고 있다. 한국사 교과서 집필과 검증 과정에서 가장 논란이 클 것으로 예상되는 분야는 다름아닌 근현대사다. 500명 이상의 회원을 보유한 한국근현대사학회가 국정 교과서 집필 불참 성명을 발표했다. 뿐만 아니다. 국내 최대 역사학회인 한국역사연구회마저 국정교과서 제작 과정에 아예 참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단순히 집필하는 일만이 아니라 심의나 교열 등의 모든 과정에 일절 참여를 보이콧하는, 보다 강경한 입장이다. 전국 초중고 역사 교사의 3분의 1 가량이 가입돼 있는 것으로 알려진 전국역사교사모임 역시 집필진 참여 거부 선언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전국 대학생들이 국정화 반대를 외치며 거리로 나서는가 하면 어느덧 중고교생들까지 가세한 모양새다. 지난 16일 이화여대, 부산대, 제주대 등 전국 23개 대학에서 한국사 국정화에 반대하는 피케팅이 동시다발로 이뤄졌으며, 서울대와 고려대 등 사회대학 학생회도 같은 날 광화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대한민국 헌법정신인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도전"이라며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한국사 국정교과서 반대 청소년행동은 11일과 17일 두 차례에 걸쳐 서울 도심에서 거리 행진을 시도했다. 주말과 휴일엔 시민단체가 중심이 된 국정교과서 반대 범국민대회 등의 집회가 시내 곳곳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국정화를 향한 정부와 집권여당의 행보는 심히 급작스러운 데다 어설프기까지 하다. 물론 이의 추진을 위해 꺼내든 논리 역시 순전히 자기 부정과 모순 투성이였음은 두 말 하면 잔소리다. 무리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향후 역사교과서 발행체제의 안착 전망을 어둡게 만드는 요소다. 구체적으로는 국정교과서의 집필진 구성도 여의치 않은 데다 집필이 이뤄지더라도 현장 적용과 감수 등 교과서 출판이 이뤄지기까지의 전 과정에 심각한 난항이 예상된다. 게다가 주어진 시간도 턱없이 부족할 판이다.


정부와 집권여당이 여론전을 펴고 있는 것처럼 국정화가 제아무리 올바른 방식이라 해도 - 물론 이는 가정법이다 - 이렇듯 자기 부정과 모순에 빠진 채 허우적거리며 무리수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양상이라면,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시작도 전에 볼 장 다 본 셈이 아닐까 싶다. 자칫 교육 주체에게 고스란히 피해만을 안기게 될 처지, 그렇다면 그로 인한 사회적 비용 따위의 후폭풍은 누가, 어떤 방식으로 감당할 것이며, 국론 정렬은커녕 이념 갈등만을 유발한 채 나라 전체를 극도의 혼란과 혼돈 속으로 빠져들게 해놓고선 정작 얻으려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올바른 역사 교과서'라는 이름과는 전혀 어울릴 법하지 않은, 올바르지 않은 데다 비정상적이기까지 한 일체의 추진 과정 및 논리적 배경 때문에라도 정부가 혹여 이를 그대로 밀어붙인다 해도 이번 '국정화'는 결국 실패작이 될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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