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정부가 제 역할을 못해 빚어지는 일들

새 날 2015. 4. 8.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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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엔 한 40대 주부가 번개탄을 차 안에 피워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차량에 화재가 나는 바람에 탈출을 시도하여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는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아울러 오늘 아침엔 서산에서 40대가 마찬가지 방법을 이용해 자살했다는 보도를 접해야만 했다.  세계 최고 수준인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비단 어제 오늘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근자엔 하루가 멀다하고 들려오는 소식이 다름아닌 번개탄을 이용한 자살인지라 우울감을 한껏 보탠다. 

 

이와 관련하여 지난 해를 한 번 떠올려 보자.  모 유명 연예인이 번개탄 자살을 시도한 이래 일반인들의 모방 자살이 한동안 지속된 적이 있다.  당시 정부는 고심 끝에, 번개탄 구입 경로 차단 등 이를 손쉽게 구입할 수 없도록 하는 방안을 날로 점증하는 자살 대책으로 제시했다가 네티즌들로부터 뭇매를 맞아야만 했다.  번지수를 짚어도 한참을 잘못 짚은 탓이다.  


번개탄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지 싶다.  최초 개발되었을 때부터 자신의 역할만을 묵묵히 해오고 있다.  그저 이를 악용하려드는 사람이 문제일 뿐...  그렇다면 이토록 단순한 방법 외 번개탄을 활용한 자살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물론 없다.  다만, 약간 줄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언론 보도 방식의 개선을 통해서 말이다.

 

언론이 미치는 사회적 영향력과 파급 효과에 대해선 굳이 언급하지 않으련다.  그만큼 막중하다는 의미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살과 관련한 우리의 언론 보도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점은 누누이 제기돼온 사안이다.  이에 정부와 언론 스스로 자살보도권고기준을 만들어 발표했고, 이를 철저히 실천하겠노라 굳게 다짐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여전히 달라진 게 없다.  당장 최근 보도된 기사들만 해도 그렇다.

 

 

윤리강령이나 권고기준 따위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모양새다.  그 사이 자살을 결심한 이들은 마치 번개탄이 고통스럽지 않게 생을 마감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인 양 모두들 이에 목을 매고 있는 실정이다.  일선 기자와 언론사 스스로가 권고기준을 수용하지 않거나 지키지 못 할 시 2차적으로 걸러내야 할 곳은 아마도 한국신문윤리위원회 내지 인터넷신문위원회쯤 될 테다.  하지만 이들마저 외면하는 상황이라면?

 

그렇다면 결국 정부가 나서야 할 테다.  언론중재위원회가 됐든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됐든 그도 아니면 문화체육관광부가 됐든, 어쨌거나 누군가는 나서서 규제를 해야 할 상황이다.  물론 자살 관련 보도를 윤리강령이나 권고기준에 맞게 철저히 준수한다 하더라도 자살 자체를 완전히 예방할 수 없음은 분명히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모방 자살 행위만큼은 막을 수 있거니와 자살을 생각조차 않았던 사람이 언론 보도로 인해 암암리에 영향을 받는 일 따위는 충분히 사전에 차단 가능할 테다.  

 

정부기관이 자신의 역할을 하지 못해 벌어지는 안타까운 일들은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달 26일 봉천동의 한 모텔에서 숨진 채 발견된 14세 소녀의 뒷이야기는, 정부가 엉뚱한 일에 힘을 쏟기보다 정작 관심을 기울여야 할 영역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여실히 증명한다.  그녀를 살해한 30대 성매수자는 스마트폰 조건만남 어플을 통해 접촉을 시도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해당 어플은 상대가 누구인지 전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채팅을 가능케 해준다는 이른바 '랜덤채팅'이다.



SBS의 보도에 따르면, 이러한 채팅 어플은 어플 마켓에서 쉽게 찾을 수 있거니와 그 종류 및 갯수가 상당한 데다 무료 다운로드까지 가능하단다.  특히 특별한 인증 절차 없이 누구나 사용 가능한 탓에 미성년자의 접근에 사실상 완전 무방비로 노출돼있다는 사실은 큰 문제점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해당 어플의 채팅 창엔 거의 100%가 성매매 내지 조건만남의 내용으로 도배되어있다시피 하단다.  이쯤되면 조건만남 따위와는 전혀 관련없는, 지극히 평범한 아이들조차 호기심에 이끌려서라도 이에 빠져들게 되지는 않을까 싶어 두렵기조차 하다.

 

이러한 류의 어플을 제작하는 데 적용되는 관련 법규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단다.  신고나 허가도 필요없이 그냥 만들어 앱스토어에 올리기만 하면 구글이나 애플 본사에서 심사후 통과 즉시 바로 등록되는 구조란다.  이의 불법성과 유해성에 대해 단속해야 할 주체는 다름아닌 방송통신심의위원회다.  이들은 최근 여고생끼리 키스하는 드라마 속 장면이 불건전하다며 이에 대해 심의를 시도하거나,  웹툰의 일부로부터 성기나 성행위 등 음란성 정보가 살짝 노출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사이트 전체를 차단하는 황당한 일엔 발 벗고 나서면서, 정작 우리 아이들을 아무런 제재없이 성매매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게 하거나 범죄 행위에 노출시키는 행위에 대해선 수수방관하고 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규제 기준에 따르면 청소년 불가가 결정되기 위해선 성인 여성의 은밀한 부위가 노출되거나 성행위 장면 등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단다.  단순히 랜덤채팅이라는 이유 때문에 청소년 불가 처분을 내리는 경우는 없단다.  이들의 논리는 이렇듯 단순하기가 그지없다.  겉으로 드러난 위험보다 은밀하게 감춰진 유해 환경이 얼마나 더 사회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지 전혀 헤아리지를 못하는 눈치다.  

 

그러는 사이 14세 소녀는 억울한 죽임을 당했으며, 지금 이 시간에도 무수한 아이들이 성매매의 마수에 빠져들거나 심지어 목숨마저 잃을 수 있는, 끔찍한 범죄 현장으로 내몰리고 있다.  정부기관이 자신의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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