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나의 독재자> 김일성으로 완벽 빙의한 설경구

새 날 2014. 10. 30.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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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포스팅엔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제목만으로는 도무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지 예측이 어려웠다.  김일성이란 단어가 언뜻 포스터상에서 보였고, 이는 관람 전 내가 이 영화의 사전 지식으로 알고 있던 전부다.  물론 주연 배우가 누구인지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결과적으로는 매우 흥미로웠던 작품이다.  남북정상회담 리허설이라는 기발한 소재를 영화적 상상력으로 풀어놓았다는 점이 매우 인상 깊었으며, 배우 설경구의 김일성으로 빙의한 듯한 혼신의 연기는 작품의 완성도와 재미를 제대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뿐이랴.  과거의 아팠던 시대상과 작금의 상황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느낌이라 많은 부분을 생각케 하기도 한다.

 

 

때는 바야흐로 날던 새도 떨어뜨린다는 서슬퍼렇던 유신정권시절이다.  성근(설경구)은 모 극단의 무명배우다.  단역으로 짬짬이 출연하긴 하지만, 그보다 포스터 붙이는 일이 더 많을 정도로 존재감이 부족하다.  어느날이다.  주연급 배우가 개인 사정으로 그만 두는 바람에 해당 배역이 성근에게 돌아가는 행운이 따랐고, 그는 열과 성을 다해 준비한 끝에 마침내 공연 무대에 서게 되는데..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수많은 관객이 들어찬 무대 위에 우뚝 선 그는 비슷한 경험이 전무했던 터라 그만 당황하다 대사를 제대로 읊지도 못한다.  당연히 공연은 망친다.  성근의 아들 태식은 아버지의 공연을 동네방네 소문내며 친구들을 잔뜩 불러모았건만, 아버지의 말도 안 되는 실수에 의해 완전히 망친 공연 탓에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된다.

 

그때다.  망연자실해하던 성근에게 누군가 접근해온다.  굉장한 공연이 있는데 성근이 적임자라며 오디션에 참가할 것을 제안해왔다.  성근은 망설이지 않았다.  오디션 현장엔 수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잔뜩 긴장한 성근은 어떡하든 합격하고 싶었다.  그런데 오디션 과정은 상상을 초월한다.  중앙정보부의 대공분실에서 폭력행사와 고문을 견뎌내는 게 그 과정이었으며 어쨌든 성근은 근성으로 버텨내 오디션에 최종 합격하는 영광을 누린다.  그에게 주어진 배역은 다름 아닌 남북정상회담 리허설 상대인 김일성 대역이었다. 



오로지 각하를 위한 그의 미션 완수를 위해 연기 전공 전담 교수가 붙어 그를 지도하고, 또한 학생운동을 벌이다 잡혀온 서울대생이 주체사상 교육을 위해 그에게 투입된다.  이후 진짜 김일성이 되기 위한 피눈물나는 연습이 진행되는데...

 

 

영화를 보면서 정상회담 리허설이란 게 과연 실재했을까 궁금했던 터다.  하지만 실제로 있었다는 전언이다.  그렇다면 완전 허구가 아니라는 의미다.  놀랍게도 영화 속에선 허구가 아닌 또 다른 장치를 발견할 수 있다.  극중 중앙정보부의 오계장(윤제문)은 유신 권력의 충견 역할을 하며 고문 등을 조종하는 악역을 맡는데, 20여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권력의 요직을 차지한 채 다시금 남북정상회담 리허설을 위해 성근 앞에 등장하는 그의 모습을 통해 현재 청와대에 계신 어떤 분을 연상시키게 한다.

 

성근은 영문도 모른 채 중정의 차가운 대공분실로 끌려가 모진 고문과 폭력 행사를 당한 끝에 김일성 대역 오디션에 합격한다.  그만이 아니다.  오디션에 참가했던 수많은 시민들 역시 영문도 모른 채 그와 똑같은 고초를 당해야만 했다.  오로지 국가와 민족이란 이름 앞에 그들은 그렇게 희생됐다.  그가 김일성 대역 연습을 하던 장소는 그가 끌려와 고문을 당했던 중정의 지하 대공분실로써 유신 정권 유지의 첨병 역할을 하던 곳이자 유신 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이 무고한 시민들을 상대로 마구 퍼부어지던 곳이기도 하다.

 

그에게 가해진 폭력은 유신 정권의 시민들에 대한 폭압을 상징하며, 소시민인 그가 유신 정권의 반민주적 반인권적 속살을 몸소 경험하며 한국 사회에선 희망이란 걸 찾을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달음과 동시에 정신 이상을 일으킨 이후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은 채 그에게 주어진 임무인 김일성 대역에만 사활을 거는 모습은 바로 반민주적인 권력의 폭력 앞에 굴종하지 않은 채 저항해나간다는 상징적인 장치로 읽힌다.

 

 

성근의 아들 태식(박해일)은 자신이 어릴 때 그를 돌보지 않았던 아버지가 한없이 미웠던 데다, 아버지의 김일성 노릇이 영 마뜩지가 않다.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신을 버린 줄로만 여겼던 태식은 성근의 수십년동안 이뤄진 지난한 투쟁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마침내 이뤄진 청와대에서의 대통령과 성근의 신들린 듯한 실제 남북정상회담 리허설을 직접 관람하며 비로소 깨닫는다.  아버지의 삶이 결코 헛된 게 아니었음을, 아울러 그 또한 아버지와 같은 치열한 삶을 살아갈 것임을 암시한다.  시대의 아픔에 의해 단절됐던 세대가 극적으로 이어지던 순간이다.  태식에 의해 뱃속에 잉태된 아기가 그 장치다.

 

 

성근이 주연배우의 대역을 위해 무대에 선 어리버리했던 모습과 수십년의 시간적 간극이 있은 후의 실제 남북정상회담 리허설에서의 완벽에 가까운 김일성 연기 장면의 오버랩은 가슴 설렘의 변주곡이자 세대를 잇는 치열한 삶의 한 양태다.  이는 폭압적인 유신정권을 꾸려왔던 아버지 세대가 마무리되고, 수십년이 지난 지금 그 자식 세대가 또 다시 정권을 잇고 있는 대한민국의 아이러니한 현실을 말해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수년전 관람했던 영화 '블랙스완'의 뭉클했던 무대 연기 장면이 그 위에 이중 삼중으로 오버랩되는 현상, 결코 우연이 아닐 듯싶다.  설경구의 김일성 연기는 정말 소름돋을 만큼 완벽에 가까웠다.

 

 

감독  이해준

 

* 이미지 출처 : 다음(Daum)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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