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경직된 사회가 빚은 촌극 '인공기 논란'

새 날 2014. 9. 11.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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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아시안게임 개막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개최 도시인 인천 등엔 대회 참가국들의 국기가 펄럭이며 대회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갈 시기이다.  하지만 정작 대회가 진행될 예정인 인천 등의 도시 길거리에선 이들 참가국들의 국기를 볼 수 없게 될 전망이다.  이게 어찌된 영문일까?  

 

ⓒ연합뉴스

 

인천 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가 지난 6일 아시안 게임 일부가 치러지는 경기도 고양종합운동장 앞 도로에 북한 인공기를 내걸었다가 일부 보수 매체와 단체 등의 항의가 잇따르자 이를 철거하는 홍역을 치러야 했다.  

 

대회 조직위는 "모든 경기장 및 그 부근, 본부 호텔, 선수촌과 메인프레스 센터, 공항 등에는 OCA기와 참가 올림픽위원회(NOC) 회원들의 기가 게양되어야 한다"는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규정 제58조에 따라 모든 참가국들의 국기를 게양했던 것이고, 인공기 역시 그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하지만 인공기 하나 때문에 결국 모든 참가국들의 국기마저 철거되는 웃지 못할 헤프닝이 연출된 셈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10일 인천 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에 따르면 경기장 인근 거리엔 아시아올림픽평의회기와 대회 엠블럼기만 내걸고 참가국의 국기는 경기장에만 게양하는 것으로 방침을 정했단다.  비록 OCA의 규정을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인공기 때문에 더 이상의 논란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노라는 대회 조직위의 속내를 내비친 셈이다.

 

ⓒ인천 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

 

그런데 이러한 결정은 애초 대회 조직위가 내세우고 있는 이번 대회의 목표와 전면 배치되는 행위이다.  대회 조직위는 이번 대회에 세 가지 목표를 내걸었는데, 그 중 하나가 '소통과 화합, 배려의 대회'로써 이념과 종교, 민족의 갈등을 녹이는 평화의 제전이자 화합과 나눔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는 감동 대회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직 대회가 개최되지도 않은 상황인데, 목표로부터 뒷걸음질 치고 있는 모양새 아닌가.



마치 질소만 가득 들어있고 실제 내용물은 쥐꼬리만큼 들어있는 국산 과자마냥 그럴듯한 화려한 언어들의 조합으로 과포장해 놓곤 있지만, 실상은 옹졸함과 편협함으로 가득차 있는 조직위의 실체와 앞서의 국산 과자가 뭐가 다른가 싶다.  스포츠를 스포츠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며 협박성 항의를 일삼는 보수단체에 굴복함은 아직 개최하지도 않은 이번 인천 아시안게임의 앞날에 어두움을 짙게 드리우는 요소다. 

 

ⓒ뉴시스

 

사실 인공기 울렁증은 그동안 우리 사회 곳곳에서 수많은 해프닝을 만들어오고 있던 찰나다.  그중 가장 최근의 사례들만 몇 가지 예로 들어보자.  지난 6월엔 국립현충원에 설치됐던 국민화합과 평화통일을 상징하는 모 대학 산업디자인학과 학생들이 만든 '평화의 문'이라는 작품이 인공기가 그려져 있다는 이유만으로 철거된 바 있다. 

 

지난해 5월엔 MBC뉴스데스크가 박근혜 대통령의 국산 헬기 '수리온'의 실전 배치 기념식 참석과 관련한 보도를 하면서 배경화면으로 연설 중인 박 대통령의 얼굴 옆에 북한 인공기를 배치한 영상을 내보냈다가 방송통신위원회로부터 경고 조치를 받은 바 있다.

 

ⓒ경향신문

 

당시 방통위는 대한민국의 상징이랄 수 있는 대통령의 얼굴 바로 옆에 '인공기'를 배치하고, 이 과정에서 '인공기'가 대한민국이라는 글자를 가리도록 화면을 구성한 것은 방송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지 못했다며 경고 조치를 결정한 것이다.  속된 말로 참 웃픈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이후 MBC가 방송통신위원회를 상대로 낸 제재조치처분 취소소송에서 원고승소 판결을 얻어내긴 했지만, 이쯤되면 결과 여부를 떠나 레드 콤플렉스와 인공기 울렁증으로 인해 황당하기 그지없는 촌극을 자꾸만 빚고 있는 우리 사회의 경직성에 혀를 내둘러야 할 정도다.

 

대회 조직위는 굳이 아시안게임에 참가하겠노라는 북한을 다른 참가국들과 동등하게 대접하지 않을 바에야 무엇하러 받아들이려 하는가?  이렇듯 자꾸 논란을 빚는 게 껄끄럽다면 애초 초대조차도 하지 말았어야 함이 옳지 않나.  기껏 초대해 놓고, 또한 경색된 남북간의 좋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대회 참가 의사를 밝힌 북한에, 이제와서 정치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분위기를 흐릴 바에야 무엇하러 초대했는가 말이다.  이는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친구에게 정작 오지 말라며 주변 상황을 부추기는 행위와 뭐가 다른가.

 

ⓒ노컷뉴스

 

얼마 전 국방부가 북한의 응원단을 남북화해협력의 사절이 아닌 미인계를 앞세운 대남선전의 선봉대에 불과하다는 내용의 장병 정신교육 자료를 국방일보에 게재해 인천 아시안게임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바 있다.  초대한 손님에게 대놓고 욕을 한 셈이니 이 정도의 상황이라면 북한의 입장에서 볼 때 아시안게임 자체를 보이콧하더라도 우리에겐 할 말이 없지 않겠는가?

 

결국 북한은 응원단을 파견하지 않겠다고 밝혔는데, 이 때문인지 몰라도 현재 아시안게임의 예매율이 매우 저조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흥행에 비상이 걸린 셈이다.  우리에게 득이 될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회 조직위나 정부는 여전히 고자세와 이중잣대로 북한을 대하고 있다.  북한은 아시안게임에 공식적으로 참가 희망을 밝힌 우리의 귀한 손님이다.  적어도 손님에겐 손님다운 응대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와 통일 대박을 부르짖던 대통령의 결기는 모두 어디로 간 걸까?  결국 모두 말의 성찬만으로 끝내려는 걸까?  동맥경화에 곧 쓰러질 정도로 경색된 남북관계에 스포츠는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될 수 있다.  남북관계 개선에 마중물 역할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를 잘 활용해야 할 정부나 대회 조직위가 반대로 이의 분위기를 해하는 행위를 공공연하게 일삼는 걸로 봐선 남북 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음을 자인하고 있는 셈이다.  스포츠는 그저 스포츠일 뿐이다.  여기에 정치적 논리와 색채를 덧씌우려는 세력들이야 말로 지극히 정치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인공기 울렁증에 온 신경이 예민해져 있을 일부 세력들은 편협한 시각을 당장 거두어라.

 

아울러 정부는 인공기 게양에 딴지를 걸거나 이를 훼손하려는 시도를 통해 인천 아시안게임 자체를 방해하려는 세력들을 엄히 처벌해야 할 것이며, 인천 아시안게임 조직위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인공기 하나로 인해 내려진 전체 참가국가에 대한 국기 게양 취소 결정을 재고해 주기 바란다.  이는 이번 아시안게임의 목표인 소통과 화합, 배려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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