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그가 그립다> 우리에겐 과분했던 노무현, 그래서 더욱 그립다

새 날 2014. 5. 23.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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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게 어딨어요,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영화 <변호인>속 송변의 대사 한 꼭지다.  생전 노무현 님의 모습을 어쩜 저리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었을까 싶다.  노무현 님의 인품과 성격이라면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와 저런 식의 투박한 말투로 한 마디 툭 내던지셨을 것 같다.  틀림없다. 

 

5월 23일 오늘은 그분이 홀연히 떠나가신 그날이다.  올해로 벌써 5번째에 접어든다.  확실히 해가 거듭될수록 북받쳤던 감정들이 추스러지며 점차 차분해져가는 느낌이다.  올해는 세월호 참사라는 국가적 재난 상황 여파 때문에 예년처럼 전국 단위의 추모 행사가 치러지지 못하는 듯싶다.  덕분에 이제껏 단 한 차례도 거른 적 없었던 서울에서의 추모행사를 올해는 참석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노무현재단 공지글 캡쳐

 

대신 책 한 권을 통해 다시금 그에 대해 조용히 생각하는 기회를 가져본다.  노무현 5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출간된 <그가 그립다>는 모두 22명에 달하는,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의 그를 향한 그리움의 메시지가 담담히 적혀 있다.

 

이 책 속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거나 인용된 게 무얼까?  영화 <변호인>이다.  이 영화가 그에 대한 그리움을 증폭시키는 데 한 몫 단단히 거들긴 한 모양이다.  <변호인>이 그의 삶을 반추해 보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면, 이 책은 그에 대한 그리움이 어느새 우리네 삶 속에 녹아들어가 각자 살아가는 방식과 양태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발현되고 있음을 절실히 깨닫게 한다.  

 

"조선 건국이래 600년 동안..."으로 시작하는 노무현 님의 2002년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을 듣고 있노라면 여전히 가슴 벅차오르는 설램과 감흥을 느낄 수 있다.  그의 멋진 명연설은 언제나 우리의 가슴 한 켠을 울릴 만큼 절절하지만, 사실 그가 꿈꿔왔던 세상은 매우 소박하다.  의식주 걱정 없이 사람이 사람 대접 받고 살아가는 그런 삶이자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사회다.  하지만 그가 떠나고 나서야 사람들은 보편적인 인류의 가치라 여겨지는 소박했던 그의 바램마저 이 정의롭지 못하고 엄혹한 세상에선 얼마나 지켜내기 어려운 일인가를 뒤늦게 깨닫는다.   



22명의 저자 중 눈에 띠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 몇 분이 계신다.  다름 아닌 노무현 님 전속 이발사 정주영 씨와 청와대 요리사 신충진 씨다.  정주영 씨의 경우 여의도에서의 인연이 대통령이 된 뒤에도 끝까지 이어진 사례로서 그는 노무현 님과 동갑이란다.  소탈하고 다른 이를 배려해온 노무현 님의 일상 속 성품이 그를 통해 고스란히 묻어나오고 있었다. 

 

식성의 까다로움과 짦음 탓에 길어야 2년을 넘기기 힘들다는 청와대 전속 요리사, 하지만 신충진 씨는 노무현 님이 대통령 퇴임하는 그날까지 함께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단다.  요리사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며 노무현 님의 따뜻한 인간적 면모를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퇴임후 봉하로 함께 내려가 마지막 식사를 차려드리며 1년 뒤 다시 찾아 뵙겠다는 약속을 했으나 결국 지킬 수 없게 돼 너무 죄송하다는 대목에선 먹먹해지기까지 한다.

 

2009년 4월 30일은 노무현 님이 참고인 조사 출석차 검찰에 출두하던 날이었다.  당시 노무현 님에게 작은 위로나마 전하고 싶은 소박한 마음에 서초동 검찰청사로 향했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뜬금없이 경찰에 연행되어 무려 3일만에 풀려난 뒤 검찰의 약식기소를 받게 된다.  소박했던 마음이 어느새 분노로 뒤바뀌는 순간이다.  처음엔 오기가 발동하여 정식재판까지 이끌었지만 나중엔 노무현 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 여긴 그는 이 사건을 무려 대법원까지 끌고 간다.  노항래 씨의 사례다.  그의 노무현 님을 향한 무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지만, 이를 통해 드러난 무지막지한 권력의 이면은 영 거북스럽스기만 하다.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 재단

 

어쩌면 우리가 살아 숨쉬며 들이키는 공기, 마시는 물 등 평소 이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다가 위급 상황에서야 절박하게 이의 귀함을 터득하듯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민주주의가 불의한 권력에 의해 침탈 당하면서 비로소 이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때문에 어쩌면 우리는 정말 누군가가 지칭한 또 다른 측면에서의 '미개한 국민'일지도 모른다.

 

영화 <변호인>이 과거의 폭압과 불의가 그 시대로 종결지어진 게 아닌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란 사실을 우리에게 재차 각인시켜 주었다면, 이번 세월호 참사는 무능과 무책임 그리고 모든 불편부당한 것들이 응축되어 감춰져있다가 돌출 상황에서 고스란히 수면 위로 떠오른, 대한민국의 실체를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라 여겨진다. 

 

이런 참담한 상황을 접하며, 국정 최고책임자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대통령이란 자리엔 정확히 현재의 국민들 수준과 국격에 걸맞는 인물이 선출된다는 사실 또한 몸소 터득했다.  적어도 몇 세대는 앞서 나타나 못난 국민들과 투닥거리느라 고생만 하셨던, 우리 국민에게는 한없이 과분하기만 한 노무현 님이 그래서 더욱 사무치게 그립다.

 

비록 가정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어 슬프지만, 만약 노무현 님이 살아계셨더라면 세월호 참사 국면에서의 후안무치한 권력과 세력들 앞에 홀연히 나타나 그만의 투박한 경상도 억양이 섞인 말투로 필시 이렇게 호통치셨을 것 같다.  

 

"이런 게 어딨어요,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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