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방황하는 칼날> 그의 방황이 우리사회에 상식을 묻는다

새 날 2014. 5. 14. 08:06
반응형

 

생활 여건이 개선되어 그런지 과거에 비해 요즘 아이들의 성장 속도는 눈부실 정도로 빠르다.  초등학생 5,6학년만 돼도 덩치가 눈에 띠게 커지며 확연히 달라 보이니 말이다.  신체는 이미 성인의 그것을 능가할 만큼 훌쩍 자란 아이들이 부지기수다.  그렇다면 정신적인 측면에서의 성장은 어떨까?  아무래도 웃자란 신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여물어 둘 사이에 부조화를 이루는 아이들의 경우가 왕왕 있다.

 

간혹 요즘 아이들이 너무 영악하다고들 말한다.  아이들을 그저 아이들로만 바라볼 수 없게 만드는 오염된 주변 환경 요인들 탓이다.  물론 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아이들의 모습은 어른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라 하지 않았던가.  결국 아이들의 모습 속에선 기성세대인 어른들의 실체가 그대로 투영되고 있는 셈일 테니, 아이들이 이렇게까지 변모하게 된 데엔 우리 어른들의 잘못이 전혀 없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니 전적으로 우리 어른들의 책임이다.

 

청소년들의 극악무도한 범죄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근래 자주 선을 보이고 있다.  이미 아이들의 신체는 성인의 것인지라 범죄 행위마저도 이젠 성인 흉내를 내기 일쑤다.  때문에 가끔 미디어 매체를 통해 전해지는 청소년 범죄는 잔혹하기가 이를 데 없다.  가뜩이나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탓에 이런 류의 영화들은 우리의 답답한 가슴을 더욱 먹먹하게 하는 상승효과를 만들어낸다. 

 

<방황하는 칼날>보다 일주일 늦게 개봉한 영화 <한공주> 역시 청소년들의 집단 성폭력 문제를 다룬다.  차이점이라면, <한공주>의 경우 밀양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한 것이고, <방황하는 칼날>은 일본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작 소설을 극화한 것이기에, 정확히 실재와 허구의 애매한 경계만큼의 그것일 테다.

 

 

아내를 일찍 여읜 이상현(정재영)은 중학생인 딸 수정(이수빈)과 단 둘이 살고 있는 전형적인 샐러리맨이자 소시민이다.  여느 봉급생활자들과 마찬가지로 야근을 밥먹듯 하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엔 술에 취해 떡이 된 채 퇴근하기 일쑤다.  그날도 그랬다.  덕분에 아침에 일어나는 일도 버겁기만 하다.  딸 수정은 그녀 대로 또래 아이들처럼 바쁜 아침 일정에 쫓겨 식사도 제대로 못한 채 인사조차 하는둥 마는둥 헐레벌떡 등교하기 바쁘다. 

 

 

오늘 아침 인사가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아빠나 딸 모두 알았더라면 좀 더 살갑게 주고 받았을 텐데..  그날 저녁, 언제나와 같이 늦게 퇴근한 아빠, 미안한 마음에 빵집에 들러 딸에게 줄 케이크 하나를 사들고 온다.  인기척이 없는 수정, 딸의 방문을 열어보는 아빠, 그러나 여전히 하교 전이다.  과거 이런 일이 없었기에 불안해지는 아빠..



좋지 않은 예감은 왜 그리도 잘 맞는 걸까?  아빠는 밤새 수소문하며 딸을 찾아다녔으나 다음날이 되어도 아이의 소식을 전해들을 수가 없다.  아빠의 불안감이 점차 깊어가며 불길함으로 변질되어가는 순간, 느닷없이 경찰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 딸 아이가 집단 성폭행을 당한 뒤 무참히 살해됐단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아빠에게 문득 의문의 문자 메시지 한 통이 전송되는데...

 

 

자신의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낸 딸의 살해범, 그의 뻔뻔스런 행동이 이상현의 분노 게이지를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게 만든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솟구친 분노와 울분이 결국 곁에 놓인 방망이를 춤추게 만들더니 영화는 은연중 클라이막스에 도달해가고 있었다.  그가 왜 방황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장면이지만, 이후로 영화는 설득력이 떨어지는 억지 설정과 지루한 이샹현의 방황이 맞물리며 그만 맥이 탁 풀리고 만다.  초반의 지나친 감정 소모 탓이다.

 

이 대목에서 비슷한 소재를 다룬 <한공주>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한공주>에서는 끔찍한 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 있을 뿐 출연한 배우조차도 감정 개입이나 이입 따위의 연출은 전혀 없다.  때문에 객관적인 카메라의 시선으로 전혀 무감각한 것처럼 차분히 보여주는 끔찍한 사건들은 오히려 관객의 내면에 분노의 불길을 싸지르게 한다. 

 

이상현의 춤추는 방망이를 통해 분노 폭발이라는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장치 따위는 단언컨대 없다.  결코 씻을 수 없는 잔혹한 범죄의 희생양이 된 주인공의 내면 변화만을 차분하면서도 집요하게 그려나갈 뿐이다.  때문에 관람 내내 답답증과 지루함을 느껴야 했지만, 관람을 끝내고 난 후엔 신기하게도 <방황하는 칼날>보다 외려 더 긴 여운이 남는다.

 

 

모 학원의 명칭이 영화 속에서 잠깐 등장하는 장면 탓에 해당 학원이 영화 제작진에게 소송을 걸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는데, 상황을 직접 보니 심정적으로는 학원의 입장이 충분히 납득된다.  영화 속에서는 학원 간판을 달아놓은 채 가출 여자 청소년들을 고용하여 변태 성매매 업소를 운영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대입 준비반'이란 명칭의 강의실은 다름 아닌 매춘 서비스를 준비 중인 학생들의 대기실로 사용되고 있어 충격을 더해 준다.  이런 학원이 과연 현실 속에서도 존재할까?

 

 

아이들은 아무리 끔찍한 흉악범죄를 저지른 파렴치범이라 하더라도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짧은 형을 선고받게 되고, 또 이를 모두 마치면 도로 사회에 쏟아져 나온다.  영악한 요즘 아이들은 이런 측면까지 머리속에서 계산하고 있단다.  감독은 베테랑 형사(이성민)의 대사를 통해 이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 시각을 슬쩍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범죄에 애 어른이 어딨어?"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전달하려 한 것일까?  잔혹한 범죄를 저질러도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가벼운 처벌만을 받은 채 얼마후 풀려나는 답답한 현실, 이들의 계속되는 범죄로 인해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겪는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닐 터, 때문에 청소년 범죄의 심각성을 우리 사회에 다시금 부각시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시도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초반부터 폭발시킨 분노로 인해 영화는 마치 이상현이 공기총을 든 채 어디론가 헤매이며 방황하듯 갈 길을 잃고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접어드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어쩌면 일본 소설 원작이란 한계에서 오는 이질감일 수도 있겠다.  절정을 통해 분노의 감정을 바닥까지 모두 소모시킨 영화는 맥이 풀린 상태에서 특별한 이유 없이 지루할 정도로 질질 끌며 시간을 채우려는 듯한 인상 때문에 재미조차 반감됐다. 

 

때문에 영화에서는 이상현의 방황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보다 오히려 그가 도대체 왜 방황했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원초적인 질문이 필요해 보인다.  자신의 모든 분노와 울분을 쏟아내고선 어쩔 수 없이 방황의 길을 선택한 이상현, 과연 그는 무엇을 위해, 그리고 누구를 위해 방황했던 걸까?

 

 

원작 : 히가시노 게이고,  감독 : 이정호

 

* 이미지 출처 : 다음(Daum) 영화 섹션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