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한공주> 아무도 공주의 눈물을 닦아주지 않았다

새 날 2014. 4. 20.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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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로 인해 나라 전체가 어수선하다.  갈수록 늘어가는 사망자를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런데 이 혼란함을 틈타 한동안 잠잠해있던 정치병 환자들이 수면 아래에 있던 머리를 빼꼼히 쳐들기 시작했다.  이번 참사를 기화로 또 다시 한반도를 좌우 프레임으로 나누어 서로 물어뜯기에 여념이 없어 보인다.  국가적 재난상황과 좌우 이념이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다고 저러는 걸까?  

 

우리 사회의 이념 갈등은 잠복돼 있다가도 이렇듯 결정적인 순간이면 언제든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사회 전체를 큰 혼돈 속으로 빠뜨린다.  심각한 사회적 병리 현상이 아닐 수 없으며, 우려하던 일이 현실화되고 있는 느낌이다.  앞으로 커다란 혼란이 야기될 때마다 비슷한 홍역을 치르게 될 게 너무도 뻔하다.  자중지란이란 표현이 딱일듯싶다.   

 

그런데 세월호의 먹먹함에 또 다른 먹먹함을 선사해 준 영화 하나가 있다.  고심 끝에 선택하여 어젯밤 관람한 '한공주'가 바로 그러하다.  10년전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모티브로 했단다.  사실을 바탕으로 한 영화라 분위기가 어떨지 대충 감지됐지만, 세월호 침몰 사태로 인해 깊숙이 침잠돼있던 감정을 더욱 가라앉히게 한 촉매 역할을 톡톡히 하고 만다.

 

 

또래 남학생들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한 한공주(천우희)는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다.  선생님의 도음으로 그의 자택에서 임시 기거하게 되는데, 약간은 극성 맞아도 공주에 대한 마음 씀씀이 하나만은 그래도 괜찮았던 선생님의 모친(이영란)과 공주는 친분을 쌓아가며 계속 함께하기로 한다.

 

 

자신이 겪은 끔찍한 사건으로 인해 정상적인 학교생활이 어려운 공주에게도 그나마 살갑게 다가오는 친구들이 있었다.  공주의 출중한 노래와 악기 연주 솜씨를 간파한 아카펠라반의 은희(정은선)가 함께 활동하자며 접근해 온 것이다.  



공주는 친구들과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나름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해나가는듯싶었는데...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현상은 현실 속에서 왕왕 있는 일이다.  이는 특히 학교 폭력이나 성폭력 사건 등에서 두드러진다.  왕따를 당해 학교 폭력에 시달리는 피해 학생에게 주변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다 왕따 당할 만하니 당하는 거야"라고...  성폭력을 당한 피해 여학생에게 세상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품행이 단정하지 못하고, 먼저 꼬리친 거야"라고..

 

 

실제 2004년 당시의 밀양사건 때도 그러했다.  가해자 부모들은 오히려 떳떳하다.  왜 피해자 가족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어야 하냐면서, 딸자식을 잘못 키워 그렇다거나 여자애들이 꼬리치는데 안 넘어갈 남자가 어딨겠냐고 항변하기 바쁘다.  자기 자식의 그릇된 행태로 인해 피해자의 삶은 풍비박산이 났는데도?

 

영화 속 어른들은 모두가 한 통속이다.  세상에 공주 편은 아무도 없다.  결국 우리 모두가 공주를 죽인 셈이다.  공주 아빠는 돈에 눈이 멀어 딸내미의 힘겨운 상황을 역이용하고, 엄마라는 작자는 공주가 얼굴 보고 싶다며 어렵게 찾아갔더니, 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조차도 모른 채 앞으로는 찾지 말라며 다른 남자 만나기에 바쁘다.

 

 

가해자들은 어떡하든 공주를 회유하기 위해 가용 지인들을 총동원, 그녀에게 접근한다.  그도 여의치 않으니 공주의 새로운 학교를 알아내 한꺼번에 몰려들어 죽일듯이 달려드는, 극도의 몰상식함을 보여준다.  유일한 피붙이인 부모마저 그녀를 내팽개쳐버리고, 그나마 도움을 주던 선생님 역시 이젠 더 이상의 도움을 주지 못한다.  조금은 친해졌다고 생각했던 친구들마저 끝끝내 그녀를 외면, 험난한 세상에 홀로 남겨진 공주.. 그 상황에서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이 사회는 이미 학교에서 배우던 그런 세상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좇아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키는 일도 서슴지 않으며, 절대 약자를 가만히 두지 않은 채 그나마 남아있는 단물마저도 모두 쏙 빼먹을 기세다. 

 

강물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이내 잠잠해지는 공주의 모습은, 그래서 우리 사회의 온갖 부조리와 무능함을 한꺼번에 안은 채 진도 앞바다 속에 잠겨있는 세월호의 그것을 쏙 빼닮았다.

 

감독  이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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