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피끓는 청춘> 질풍노도와도 같았던 7080 청춘들

새 날 2014. 1. 22.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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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복고풍이 대세이긴 한가 보다.  드라마를 평정한 복고 열풍이 영화계에까지 파고들었다.  때는 바야흐로 80년대다.  아니 정확히 1982년,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의해 스러져간 뒤 '서울의 봄'을 계엄령으로 짓밟고, 민주화를 외치던 무고한 광주시민들을 군홧발로 짓이긴 채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 정화운동을 빌미로 거리의 부랑자들을 죄다 삼청교육대에 쓸어넣어 한껏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놓더니, 이젠 반대로 삭막한 분위기를 가라앉힐 무언가가 필요했는가 보다.

 

당시까지만 해도 남학생들은 까까머리, 여학생들은 단발머리에 일본식 교복과 가방을 착용하고 다녔다.  칙칙한 녹색의 그 가방에 대한 기억이 얼마나 강하게 남아 있으면 아직도 내 뇌리에서 그의 녹색 창연한 모습이 떠나질 않는다.  일본 강점기로부터 벗어난 지 어언 반세기 가까이 흘러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복장은 한결 같았다.  그런데 철옹성 같기만 했던 학생들의 복장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 두발 자율화가 먼저 시작됐다.  까까머리를 자유롭게 기를 수 있게 된 것이다.  검은색 일색이었던 신발에도 자율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보세 신발이라고 하여 수출되던 알록달록 형형색색의 운동화들이 대거 등장했다.  1983년엔 마침내 교복 자율화까지 이뤄져 교복 없는 학교생활이 가능해졌다.



나이키를 비롯한 브랜드 신발의 등장도 이때가 기점이다.  신발 자율화로 풀린 학생 신발 시장에 글로벌 메이커들이 눈독을 들이지 않을 리 만무했다.  프로스펙스, 아식스, 나이키, 아디다스, 푸마 등 다양한 브랜드가 선보였지만, 대세는 나이키였다.  나이키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나이스, 페가수스와 같은 짝퉁까지 등장시켰을 정도다.

 

82년까지만 해도 남녀칠세부동석 사상이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배해오던 터라 대도시에서 남녀공학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도시를 벗어나게 되면 사정이 조금 달랐지만 말이다.  영화속 홍성농고는 남녀공학이었다.  2년생 강중길(이종석)과 영숙(박보영)은 어릴적부터 단짝 친구다.  다만 집안 사정 때문에 언젠가부터 중길은 영숙이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던 터다. 

 

 

영숙은 소위 말하는 일진이다.  이는 홍성공고 일진 광식(김영광)과 전략적 동맹 관계를 유지하는 대가로 얻은 결과물이다.  물론 광식은 사적으로 영숙에게 연정을 품고 있기도 하다.

 

 

한편 중길은 빼어난 외모 덕분에 학교 내에서 카사노바로 꽤나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인물이다.  자신이 점찍은 여학생을 꼬셔서 넘어오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으며, 타겟으로 찍은 여학생을 쟁취하자마자 마치 전리품처럼 사진 속에서 그들을 하나 둘 지워나가고 있을 정도였다. 

 

 

광식은 영숙의 마음을 얻어보려고 갖은 수를 다 써보지만, 영숙의 마음은 언제나 중길을 향해 있다.  때문에 다른 여학생들에겐 잘도 접근하며 카사노바 짓을 일삼는 중길이 자신에게만은 접근조차 않아 야속하기 그지 없는 영숙이다.  더군다나 서울에서 전학온, 당시 3대 여신이었던 배우 정윤희 유지인 장미희를 합친 것보다 더 예쁜 소희(이세영)의 등장으로 둘 사이의 관계는 더욱 험악해진다.  카사노바 중길이 예쁜 소희를 그냥 둘 리 없다.  중길, 영숙, 소희, 광식 이 네 사람의 러브라인은 이렇게 형성되어 가는데.....

 

 

영화 시작부터 옛 감성을 자극해 온다.  7,80년대를 풍미했던 산울림의 개구장이가 배경음악으로 깔린다.  이뿐만이 아니다.  실은 산울림 광팬인 내가 그들을 좋아하기 시작한 연도가 정확히 1982년이었으며, 당시 봄에 대히트를 쳤던 '청춘'에 이어 후속곡으로 선보인 '내게 사랑은 너무 써'가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우리들의 예민한 감성을 자극해오며 흥얼거리게 만들었었다.

 

중길이가 소희에게 빠져 헤어나지 못할 때 등장한 배경음악이 바로 '내게 사랑은 너무 써'였는데, 당시 우리의 감성을 자극했던 그 느낌을 제대로 살려주고 있다.   감독이 당시의 시대상황을 영화 속에 정확히 매치하려 노력한 흔적이 역력해 보인다.  그룹 사운드가 대세였던 당시 산울림과 어깨를 나란히했던 그룹 송골매의 대히트곡 '어쩌다 마주친 그대'가 빠지면 섭했을 뻔했는데, 이 노래 역시 등장한다.

 

옛노래를 배경으로 한 장면과 영화 속 상황이 완전히 엇박자인 듯하여 촌스러움을 연출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러한 측면이 우리의 감성을 더욱 자극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깨알 같은 소품들의 면면을 봐도 꽤나 신경 쓴 흔적이 역력하다.  영숙이가 중길에게 선물로 준 아식스 운동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당대 최고 인기 메이커는 나이키다.  하지만 나이키는 여전히 인기있는 브랜드로 살아 있고, 아식스란 브랜드는 80년대 당시에 비하면 존재조차 의심스러울 만큼 대중들의 관심과 인기에서 저만치 벗어나 있다.  감독이 그런 부분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기울였다는 의미다.

 

소희가 신고 있던 양말의 브랜드는 아놀드파마, 여자 선생님이 입고 있던 상의의 브랜드 역시 같은 아놀드파마였으며, 남자선생님의 상의엔 라코스떼 브랜드 표시가 선명했다.  당시엔 무척이나 귀했을 외제차가 잠깐 선을 보이는데 무려 '포드' 브랜드다.  당시 즐겨 마시던 환타는 여전히 사랑을 받고 있다.

 

쉬는 시간에 몰래 도시락을 까먹던 장면과 소풍가서 요즘 아이돌그룹처럼 떼로 몰려 나와 춤 추며 장기자랑하던 모습은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요즘은 너무 흔해져 잘 먹지도 않는 바나나, 당시엔 엄청나게 귀한 과일이었다.  1년에 잘해야 한 두번 먹어볼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말이다.  부잣집 딸내미인 소희가 학교에서 바나나를 꺼내 먹을 때 주변에서 부러움으로 쳐다보던 눈길, 딱 당시 상황이다.

 

 

출연 연기자들의 뛰어난 연기력 덕분에 배꼽 빠지게 웃다가 다시 슬퍼지기를 수 차례,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갈 때까지 멍 때리며 앉아있기는 처음인 듯싶다.  마지막으로 흘러 나오는 박보영이 직접 부른 노래 탓이다.  가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청아한 그 목소리에 빠져 난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그녀의 당찬 연기가 상영 내내 내 눈길을 사로잡았었는데 노래마저도 수준급이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종석의 능글맞은 연기도 봐 줄만 했다.  권해효씨의 연기는 언제 봐도, 어느 역할을 맡아도 구수하고 정감이 넘친다.

 

 

영화는 코믹, 멜로, 액션 모든 요소가 조금씩 가미됐다.  곳곳에 반전도 숨어 있다.  네 사람을 둘러싼 러브라인도 흥미롭다.  소희의 공주병 코스프레는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물론 소희의 반전은 그 무엇보다 확 깨게 하는 묘미가 있다.  7080 세대에겐 확실히 옛 감성을 자극해올 것이며, 젊은 세대들에겐 요즘 한창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선남선녀 연기자들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선사해 줄 수 있을 듯싶다.

 

가뜩이나 좋지 않은 소식들로 가득찬 세상일로 인해 우울하거나, 짜증나는 일들 때문에 시름이 가득하다면, 이 영화를 통해 털어보실 것을 권해 드린다.  확실히 기분 전환엔 탁월한 효험이 있는 듯싶다.  경험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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