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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을 쓴 소녀> 빼앗긴 자아 찾기 위한 소녀의 눈물겨운 여정

새 날 2014. 1. 24.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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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오롯이 주변 여건에 의해 자유를 강제 헌납 당하고, 남의 삶을 살 뻔했던 한 소녀의 눈물 겹도록 힘들고 지난했던, 자유와 자아 찾기에 관한 짧은 기록이다. 

 

비록 그녀의 육체는 가녀린 소녀의 그것에 불과했지만, 그 누구보다 삶에 대한 강한 애착과 뚜렷한 주체성을 지닌 그녀였기에 폐쇄된 조직내에서의 무모함이 빚어낸 온갖 고난과 절망 속에서도 자신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결코 멈출 수가 없었다.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 하기란 생각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집단성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는 폐쇄된 특수 조직에선 더욱 그러하다.  마치 군대와도 같이 폐쇄된 조직 내에서, 조직 수장이 바라보고 있고 모든 조직원들이 함께하는 공식석상에서 자신의 생각이나 의지와는 상관 없는 답변을 공개적으로 요구받게 된다면?  위압적인 조직 분위기를 견뎌내지 못하는 대부분의 조직원들, 어쩔 수 없이, 또는 눈앞의 당장 이익을 취하기 위해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말 테다.  



심지어 그 요구사항이 옳지 않은 일인 줄 분명히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안위를 위해 모른 척 조직의 대의명분을 좇아 암묵적으로 수긍해야 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폐쇄성이 만들어낸 폭력의 또 다른 양태라 할 수 있다.  때문에 폐쇄성 짙은 조직일수록 조직 수장의 인물 됨됨이와 역할이 더욱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조직 수장의 인성에 문제가 있고 더불어 주변 여건이나 시대적 조류마저 도와주지 않는 상황이라면 해당 조직은 외부와 철저히 단절되고 폐쇄되어진 탓에 그 어느 곳보다 위험천만한 장소로 돌변할 수 있다.

 

 

군대 내에서 횡행해온 인권 유린만 하더라도 외부에 알려지는 경우가 극히 드물고, 대부분 해당 조직 내에서 대충 무마시키는 경우가 다반사다.  일반적으로 개방된 사회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사안들조차 군이라는 특수성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상황이 왕왕 발생한다.  그렇다고 하여 하소연할 데도 딱히 없다.  잘못 입을 뗐다가는 되레 역풍을 자초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옳은 건 옳다 해야 하고 틀린 건 틀리다고 해야 할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사회의 진보는 그러한 사람들에 의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군 조직에 반기를 들며 상부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면 어떠한 일이 벌어지게 될까.  아마도 밤마다 불려다니며 얼차려와 집단린치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될 테다.  물론 요즘 군에선 구타와 같은 폭력이 과거처럼 흔치 않은 일이라지만 폐쇄된 특수성 탓에 여전히 암암리에 벌어지고 있음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일 테다.

 

 

때는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 언니의 결혼으로 인해 가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한 수잔(폴린 에티엔)의 집, 때문에 그녀의 부모는 16세에 불과한 수잔을 수도원에 맡기게 된다.  잠깐 머물게 될 줄 알았던 예상과는 달리 부모는 수잔에게 아예 수녀가 될 것을 종용한다.  가뜩이나 원치 않은 수도원에서의 삶, 부모의 종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를 따르긴 하지만 마음은 늘 수도원 밖을 향하고 있다.  그나마 원장수녀의 따뜻한 보살핌이 수잔에게 있어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수녀가 되기 위한 과정을 모두 마치고 서원 선서를 하던 어느날, 수잔은 솔직하게 자신의 뜻을 밝히라는 신부의 말에 수녀가 되는 일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며 서원 받기를 거부한다.  수도원은 서원 거부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로 인해 발칵 뒤집히고 만다.  결국 수도원에서 쫓겨나게 된 수잔, 이번 사건을 빌어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게 되고, 엄마의 간곡한 부탁과 더불어 자신의 잉태와 관련한 죄를 사함 받기 위해 다시금 다른 수도원을 물색하게 되는데...

 

 

수잔의 자아 찾기 의지는 2년만에 무려 세 곳의 수도원을 전전하는 형태로 발현된다.  앞서도 언급했듯 폐쇄된 조직일수록 수장의 역할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수잔이 모진 고초를 당한 데에는 엄혹한 봉건시대라는 시대적 조류의 영향도 있었겠고, 그런 상황에서 종교를 거역하는 일종의 반역행위에 대한 대가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수도원의 수장이랄 수 있는 원장수녀의 성격과 됨됨이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폐쇄성이라는 특수상황과 조직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여 은밀하게 벌어지는 수도원 내에서의 폭력행위는 종교를 빙자한 인권 유린이자 범죄행위에 다름 아니었다.  히스테리와도 같은 원장수녀의 괴팍한 성질은 수잔을 졸지에 마녀로 둔갑시켜 놓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수도원을 벗어나게 해달라는 수잔의 외침은 그저 폭력으로 되돌아올 뿐 일말의 재고의 여지조차 없는 일이다.  차라리 허공에 외치는 외마디가 외려 더 가치 있을 듯싶다.  중세 유럽에서 횡행했던 마녀사냥의 수도원 버전이다.  물론 당시 인권이란 개념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지만, 설사 존재했다 하더라도 이러한 조직 내에서 그를 논한다는 건 사치처럼 느껴진다.

 

 

그 뿐만이 아니다.  여성들만의 폐쇄된 공간, 금욕을 금과옥조로 여겨온 수도원에서 성적 일탈행위는 철저하게 금기시돼온 항목일 테다.  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은밀하며 음험한 행위가 수도원 곳곳에서 암암리에 벌어지기도 한다.  억제된 내밀한 욕망의 분출 대상을 어쩔 수 없이 조직원들에게서 찾는 듯하다.  인간의 타고난 본성을 억제해온 강제에 대한 반작용이자 폐쇄성의 한계다.  특히 원장수녀에게 성도착 증세 내지 동성애 경향이 있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수잔 역시 그에 따른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조직 내 권력을 잡기 위한 암투는 수도원 밖에서 벌어지는 그것보다 오히려 더욱 처절하고 잔인한 일면을 보인다.  최고 권좌에 오르기 위해 온갖 술수가 동원되며, 때로는 경쟁자를 죽음에 이르게까지 한다.  그러고선 교묘한 방법을 동원, 이를 감추기도 한다.  사회의 축소판이면서도 폐쇄조직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더욱 살벌한 분위기가 연출되는 셈이다.  그러나 밖에서 바라보는 수도원은 언제나 평화롭고 평온하기 그지 없다.

 

모두가 어쩔 수 없이 '예'라고 답변해야만 하는 위압적인 상황에서도 자신의 의지대로 '아니오'라고 외칠 수 있는 패기는 결국 수잔만의 또렷한 자아를 보여주는 장치이다.  우린 사회 생활 중 혹은 일상 생활에서조차 당연히 잘못된 줄 알면서도 '예'라고 답해야 하거나 분명히 옳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니오'라고 답을 해야 하는 상황과 종종 맞닥뜨리게 된다.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거나 그른 것을 그르다고 표현하는 데에도 엄연히 용기가 필요한 세상이다. 

 

 

영화는 폐쇄된 조직 내에서 얼마든 발생할 수 있는 부당성과 폐해를 적나라하게 까발리면서 철저한 집단성에 의해 감춰져야만 하고 또 그래서 약자일 수밖에 없는 한 소녀의 처절한 나홀로 투쟁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조직이 지향하는 방향과 반대편에 선 그녀, 때문에 마치 바위에 계란 던지기와도 같은 무모함으로 비쳐진다.

 

아마도 앞뒤 재단 없이 자신의 소신대로 또박또박 표현할 줄 아는 수잔만의 당돌함과 뚜렷한 자아 정체성이 결국 잃었던 자유를 되찾게 해주고 원래의 삶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베일을 쓴 수잔, 거꾸로 이를 벗어버리기 위해 보여주었던 그녀의 피눈물나는 여정이 너무도 안쓰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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