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변호인> 인류 보편적 가치 '인권'에 눈을 뜨다

새 날 2013. 12. 19.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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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까지 영화 관람을 고대해가며 조바심을 내본 건, 어릴적 로보트태권브이 시리즈가 새로 나오기만을 눈 빠져라 기다리던 이후 처음 있는 일인 듯했다.  사실 이 영화의 제작에 대한 언급이 있은 후 벌써부터 관람하기로 찜해 두었으며, 개봉일만을 손 꼽아 기다려왔던 터다.  구체적인 개봉 일정이 나온 뒤론 바로 예매하여 상영관으로 한 걸음에 냅다 달려가 본 영화이기도 하다. 

 

사정상 이번 영화는 마눌님과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난 절친과의 관람 약속을 지키기 위해 퇴근후 부리나케 달려가야 했다.  상영관 가는 길목의 전철 환승 거리는 너무 길었고 배차 간격은 또 왜 이리도 더딘지, 내딴엔 빠른 방법을 택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큰 실수를 범했다.  발바닥에 땀 나도록 뛰거니 걷거니 하여 관람시각 10분 전이 되어서야 드디어 상영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좌석에 앉아 영화 시작을 기다리는 동안 마치 봉하마을 방문했을 때의 두근거림이나 설렘과 같은 묘한 감정들이 교차했다.  휴~ 그 분을 만난다는 건 역시 쉬운 일이 아니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말 속이 후련한 영화다.  올해 본 영화 중 최고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함께 관람한 절친 녀석, 가족들 모두 데리고 다시 보기로 했단다.

 

 

고졸 판사 출신 송우석(송강호 분) 변호사는 가방끈 짧은 학력 때문에 사법고시 합격 때나 판사 임용시 수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법조계에 입문했다.  하지만 정확히 거기까지였다.  변호사가 된 이후에도 고졸 출신이란 꼬리표는 그를 끝까지 쫓아다니며 활동 반경에 제약을 가해 왔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힘들게 공부했던 그의 지상 과제는 돈이었고, 그를 위로해 줄 만한 대상 역시 돈밖에 없었다.

 

 

다행히 송변은 돈 버는 수완을 타고 났던 모양이다.  법망을 벗어나지 않을 만큼의 틈새 시장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 그 방면에서 나름의 성공을 거두며 꽤 많은 돈을 모으게 된다.  하지만 가정을 꾸리고 돈 버는 재미로 하루 하루를 살던 그에게 뜻밖의 사건이 벌어진다. 

 

 

그가 고시 공부하던 때부터 찾던 국밥집, 그집 아들이 대학생이 되어 야학을 운영하던중 공안당국에 의해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게 되고, 무려 두 달동안 아들의 소식을 알 수 없어 전국을 찾아 헤매던 국밥집 주인(김영애 분)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송변에게 찾아와 아들의 수소문을 부탁하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 한켠을 무겁게 짓누르는 듯한 답답함이 느껴졌지만 딱히 그 정체를 알 수는 없었다.  아마도 영화속 배경이 되었던 시대로부터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작금의 그것을 비교해 볼 때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은 느낌 때문이리라.  7,80년대의 권력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가장 민감한 사안인 이념을 잣대로 들이대며 공권력을 이용, 간첩단 사건과 용공이적단체를 조작하여 무고한 학생과 시민들을 붙잡아 국보법 혐의로 뒤집어 씌운 채 불법 감금 폭행 고문 행위를 일삼아 왔던 부정한 군사독재정권이었다.  



영화는 소위 '빨갱이'라 불리는 이적 단체와 그 소속원들이 어떤 방식으로 조작되어 만들어지고 권력 유지에 이용돼 왔는가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두 눈을 감싼 채 모처의 대공사무실로 끌려간 대학생들은 생사를 넘나드는 무수한 구타와 고문을 통해 허위자백을 하기에 이르고, 서로 입을 맞춰 가짜 행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들에게 있어 인류 보편적 가치 '인권'이란 애초 존재하지 않았다.  설사 고문을 받다 죽임을 당해도 그뿐이다.  영화 내용 중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에 의해 도화선이 됐던 87년 6월 민주항쟁의 모습이 잠깐 비쳤지만, 만약 박종철씨의 고문 치사 행위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고문으로 죽어간 다른 이들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됐더라면 아마도 우리가 현재 숨 쉬고 있는 공기의 종류는 달라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국밥집 아들 사건으로 인해 인권에 비로소 눈을 뜬 송변, 시국 재판 참여를 자청해가며 불의한 세력과 맞서 싸워 나간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불과하다는 세간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집과 배짱을 꺾을 순 없었다.  재판정을 울리는 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마치 3당 합당 당시 그 분의 "이의 있습니다"라고 외치며 김영삼 총재에게 맞서던 당당함, 그리고 5공 청문회 당시의 올곧고 당찬 모습과 맞닿아 있었다.

 

 

송강호의 연기력이 놀랍다.  털털하지만 간지 흐르던 그 분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한 흔적이 역력했다.  설국열차에서의 답답했던 역할보다 송강호 씨에겐 그 분의 역할이 정말 찰떡궁합이란 느낌을 받았다.  시원시원하며 정곡을 찌르던 그의 대사는 꽉 막혔던 체증을 뚫어낼 만큼 직설적이었고, 너무도 통쾌했다.  덕분에 영화속에서의 재판이 모두 끝나갈 무렵 하마터면 난 박수를 칠 뻔 했다.

 

이념을 이용한 권력 유지 방식은 21세기인 지금도 '종북'이란 이름 하에 보다 교묘한 방법으로 여전히 횡행하고 있어 우리를 갑갑하게 한다.  아울러 일명 부림사건이라 불리는 영화속 사건 재판에 관여했던 실제 공안검사 등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현재의 집권 여당에서 실세 행세를 톡톡히 해왔고, 이보다 더욱 잔인했던 또 다른 공안통들은 여전히 권력의 오른팔과 왼팔 노릇을 하며 대한민국을 쥐락펴락 하고 있어 그동안 무수한 변화를 겪어온 우리 사회를 무색케 하고 있다.  실상 영화속 시대인 7,80년대와 그로부터 3,40년이 흐른 현재를 놓고 비교해 봐도 크게 달라진 바 없음은 그야 말로 넌센스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 엔딩장면에서 고 노무현 대통령께서 직접 부르신 '상록수'나 '사랑으로'를 은근히 기대했는데 나오지 않아 개인적으로 무척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실은 감독의 탁월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노무현 대통령을 기리는 작품이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의 중요성을 알리는 작품이다.  만일 노무현 님의 노래가 흘러나왔더라면 관람석 전체는 일시에 눈물바다가 되었을 공산이 크고, 때문에 이런 장치를 애초 배제시켜 객관성을 담보해 내며 정치색을 띤 영화란 논란으로부터 상당 부분 자유로워진 감독의 전략, 어쩌면 진정한 신의 한 수일지도...

 

끝으로 고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참여한 적 없노란 망언을 퍼부었던 새누리당 김무성 의원께 이 영화를 적극 추천하는 바다.  복습을 위해 반드시 두 번 관람하실 것을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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