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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선 안 될 아픈 현대사.. 영화 <한란>

새 날 2026. 3. 6.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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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벌대 피해 산으로

 

1948년 제주도, 집단 학살을 일삼아 온 토벌대를 피해 마을 주민의 다수가 한라산으로 몸을 숨긴 상황. 그 무리 안에는 해생 엄마 고아진(김향기)도 있었다. 그녀는 해생과 할머니만 남겨 두고 다급히 몸을 피했다. 집에 머물던 해생과 할머니는 얼마 후 토벌대에 의해 발각되고 만다. 마을 공터로 끌려 나온 두 사람. 그곳엔 이미 이들과 비슷한 처지의 마을 사람들로 가득했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미군의 지시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민들을 향해 쏟아지는 총탄 세례. 현장은 핏빛으로 물든다. 눈 깜짝할 새 빚어진 참극이었다. 

 

영화 <한란>의 한 장면 ©(주)트리플픽쳐스

 

해생의 안위가 몹시 궁금했던 아진은 함께 피신하여 동고동락해 온 일행을 뒤로 하고 결국 마을로 유턴한다. 아진이 하산하는 길 위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건 다름 아닌 남로당 무장대원들. 이들은 자신들이 밀고 당할 것을 우려해 아진에게 딸 찾는 일을 돕겠다며 속이고 그녀를 탄약 나르는 일에 강제 동원한다. 모진 고초 끝에 이들로부터 간신히 빠져나온 아진. 하지만 마을을 모두 불사르고, 그것도 모자라 산악 정벌에까지 나선 토벌대가 바로 코 앞에 있었다. 

 

영화 <한란>은 1948년 제주4.3사건 당시 집단 학살에 나선 토벌대를 피해 한라산으로 몸을 숨긴 한 모녀의 극적인 생존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영화 <한란>의 한 장면 ©(주)트리플픽쳐스

 

재회하는 모녀

 

할머니와 마을 주민들이 한꺼번에 죽임을 당한 현장에서 해생만이 간신히 살아 남는다. 총탄이 퍼부어질 당시 할머니의 품안에 꼭 안겨 있던 덕분이다. 해생은 우여곡절 끝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토벌대가 휩쓸고 간 자리는 무엇 하나 성한 게 없었다. 애지중지 키우던 돼지마저 사라지고 없었다. 마을에 불을 지르는 것도 모자라 사람의 흔적마저 깨끗이 지워버리려는 듯 토벌대의 움직임은 기민하고 집요했다. 머지 않아 해생의 집도 재만 남을 게 뻔했다. 집을 빠져나와 무작정 산을 오르기 시작하는 해생.

 

딸을 찾기 위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하산을 시도하는 아진. 그리고 엄마를 찾겠다며 무작정 산으로 향하는 해생. 두 모녀의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닿은 걸까. 산중에서 극적으로 재회하는 아진과 해생. 하지만 안타깝게도 해생은 집단 참극의 충격 탓인지 실어증을 앓는 처지였다. 영화는 이후 턱밑까지 추격해 온 토벌대를 피해 한라산을 오르내리거나 동굴 속을 헤매고, 바다로 뛰어드는 등 처절했던 두 모녀의 생존 여정을 스크린 위에 담아낸다. 

 

영화 <한란>의 한 장면 ©(주)트리플픽쳐스

 

동굴에서 길을 찾지 못 해 헤매다가 기력이 다한 아진에게 실어증을 앓던 해생이 말문이 트임과 동시에 처음으로 꺼낸 말 "어멍 죽지마요". 그동안 자신을 아끼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가고, 또한 주변 사람들의 죽어가는 모습을 목도해 온 6살 여아가 그 충격으로 인해 언어를 잃었다 간신히 되찾은 뒤 꺼내든 이 말은 우리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극의 대사가 모두 제주도 방언으로 돼 있어 제주도 출신이 아닌 배우들이 이를 소화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영화 <한란>의 한 장면 ©(주)트리플픽쳐스

 

첨예한 이념 대립과 갈등이 야기한 피해는 온전히 무고한 시민들의 몫. 극에서도 잘 표현되고 있지만, 당시 군과 경찰로 이뤄진 토벌대가 민간인을 상대로 벌인 살육 행위는 광기 그 자체였다. 이성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었다. 학살은 노인, 여성, 아이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자행됐다. 아무런 죄가 없다는 항변은 묵살되었고, 폭도로 둔갑된 시민은 현장에서 즉각 처형됐다. 심지어 산에서 숨어지내다가 토벌대의 회유에 못 이겨 백기 투항에 나선 죄 없는 주민들까지 가차 없이 살해될 만큼 당시 제주도는 아비규환의 생지옥이었다.

 

모두가 기억해야 할 아픈 현대사

 

천혜의 자연 환경과 매혹적인 풍광을 자랑하는 땅 제주도. 하지만 이 조용하고 아름다운 섬은 역사적 상흔이 짙게 서린 곳이자 비극적 참상이 이면에 각인돼 있는 곳이다.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지리적 고립과 정치적 억압 속에서 공동체가 함께 감내해낸 고통, 오랜 기간 침묵을 강요 당하며 세월에 묻혀버린 아픔, 그리고 외부의 지원과 공감 없이 오롯이 홀로 겪으며 인정 받을 수 없었던 상처 따위가 섬 곳곳에 눌러 붙어 있다.

 

영화 <한란>의 한 장면 ©(주)트리플픽쳐스

 

제주4.3사건은 우리 현대사에 있어 6.25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큰 사건이다. 많은 이들의 수고로움 덕분에 지난 해 제주4.3사건의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인류의 주요 기록물로 인정 받으며 제주의 아픔을 세계인과 함께 공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영화 <한란>의 한 장면 ©(주)트리플픽쳐스

 

'한란'은 한겨울에 꽃을 피우는 난의 한 종류로, 한라산에서 자생하며 멸종 위기에 처한 식물이다. 천연기념물 제191호로 지정돼 있다. 한란이 이 영화의 제목으로 쓰인 데엔 남다른 의미가 있다. 제주도 한란이 지닌 속성처럼 제주4.3사건이 오래도록 기억되고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하명미 감독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다.

 

영화 <한란>은 특정 이념 혹은 인물의 옳고 그름을 가리려 시도하지 않는다. 집단 학살을 피해 산으로 올라간 우리 이웃들과 마을에 남겨진 사람들이 당시 겪어야 했던 아픔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 우리가 절대로 잊어선 안 될 대한민국의 아픈 현대사를 기억해냄으로써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의 넋을 달래고, 오랜 기간 연좌제로 고통 받았을 제주도민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감독  하명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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