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외피에 집착하는 요즘 시대에 역행하는.. 영화 <파반느>

새 날 2026. 2. 28. 17:25
반응형

공룡으로 불리는 여자, 미정

 

백화점 지하 주차장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청년 경록(문상민). 그는 어느 날 지하 창고에서 물건을 나르며 바삐 움직이는 한 여성을 발견한다. 백화점 정직원, 그것도 사무직군에 배치된 미정(고아성)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녀는 직원들 사이에서 이미 유명 인사였으며, 공룡이라는 별칭으로 통했다. 잘 꾸미지 않은 외모로 주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그녀만의 독특한 능력 덕분이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고, 그 다음에는 동정심이었는지도 모른다. 높은 곳에 위치한 제품을 끌어 내려야 한다거나 많은 짐을 들고 매장까지 이동해야 하는 수고로움을 그녀 혼자 짊어진 모습이 경록의 시선엔 안쓰러웠다. 자신의 일을 하다가도 혼자서 어려움을 감내해야 하는 미정을 발견하면 열일 마다하고 그녀를 도왔다. 그 날도 미정은 양손 가득 사은품을 들고 VIP고객 행사장으로 이동 중이었고, 경록은 힘을 보탰다.

 

영화 <파반느>의 한 장면 ©넷플릭스

 

영화 <파반느>는 따로 할 때보다 함께할 때 더 빛이 나고,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비로소 온전한 '나'가 되는, 청춘 남녀의 특별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혼자일 땐 누구든 결핍을 호소하지만, 진정한 사랑을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는 긍정 메시지를 던진다. 박민규가 쓴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원작.

 

영화 <파반느>의 한 장면 ©넷플릭스

 

가까워지는 두 사람.. 그리고 이별

 

VIP고객 행사장에서 흘러 나오는 연주곡, 그것은 '파반느'였다. 16세기에서 17세기 사이 유럽 궁정에서 유행했다고 하는 2박자의 느리고 장중한 춤곡이다. 미정이 귀를 쫑긋 세우고 연주에 심취해 있는 모습을 포착한 경록. 서로의 취향이 같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그녀에 관한 모든 게 궁금해진다. 이후 경록은 곤혹스러워 하는 미정의 반응을 뒤로 한 채 그녀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그리고 열심히 다가간다.

 

두 사람이 보다 가까워지는 계기는 주차장에서 경록과 함께 일하는 요한(변요한) 덕분이다. 그가 두 사람 사이에 적극적으로 끼어들어 다리를 놓는다. 미정을 알아갈수록 빈 곳이 채워지는 충만함이라는 걸 경험한 경록은 포기했던 춤을 다시 시작하고 대학에도 진학한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될 것만 같았던 두 사람의 관계에 변수가 생긴다. 요한이 자살을 시도한 것. 이 사건 이후 미정은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은 채 홀연히 떠난다. 

 

영화 <파반느>의 한 장면 ©넷플릭스

 

결핍

 

미정은 불우한 가정 환경과 어릴 적 따돌림 경험으로 인해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아온 인물이다. 남 앞에 나서기를 주저하며, 타인과의 충돌이 빚어지는 걸 원치 않아 웬만하면 본인이 양보하는 길을 택해 왔다. 이러한 결핍이 자아를 지배해 온 탓에 그녀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워버리는 삶에 익숙해져 있다. 

 

영화 <파반느>의 한 장면 ©넷플릭스

 

경록은 원래 무용수가 꿈이다. 하지만 최근 이를 접었다. 얼마 뒤 백화점 주차 안내 아르바이트에 뛰어들었으나 이마저도 무표정한 얼굴로 간신히 하루 일과를 소화할 뿐, 매사에 의욕이 없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 배경엔 어릴 적 어머니와 자신을 버리고 간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결핍이 자리한다.  

 

영화 <파반느>의 한 장면 ©넷플릭스

 

요한은 밝은 성격과 유쾌한 언행으로 주변 사람들을 늘 즐겁게 하고 분위기를 띄우는 재주가 있지만, 그의 내면은 완전히 딴판인 인물이다. 진정한 관계에 목말라 하는 순정파이자, 삶의 공허함에 짓눌려 방황하는 캐릭터로 그려진다. 그는 경록과 미정을 잇는 조력자 역할을 자처하며 스스로 결핍을 메우려 시도한다.

 

영화 <파반느>의 한 장면 ©넷플릭스

 

그렇다면 경록이 미정에게 끌려, 종국엔 빠져들었던 이유는 무얼까. 역설적이게도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배척해 온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인 꾸미지 않음이 핵심 포인트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방황하던 경록에게 세상의 속도에 맞추지 말고 자신의 속도에 맞춰 살라며 넌지시 말하던 그녀만의 삶에 대한 진지하고 솔직한 태도에 반한 셈이다. 좀 멋있는 할머니가 되어 좋아하는 책을 읽으면서 꼼지락거리며 살고 싶다는 그녀의 소박하면서도 진지한 꿈이 현실의 삶 속에 이미 투영돼 경록에게 가 닿은 것이다. 

 

모든 사랑은 오해다

 

세상 그 어떤 사랑도 영원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모든 사랑이 영원할 거라는 건 오해다. 다만, 인디언들이 말을 타고 달리다가 뒤따라오던 영혼이 잘 따라올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해 말에서 잠시 내려 쉼을 갖듯, 언젠가는 다시 만나기를 꿈꾸며 현생을 살아가도록 배려하고 보살펴 주는 원천이 다름 아닌 사랑 아닐까. 경록의 삶이 윤이 날 수 있었던 건, 바로 당신으로부터 받은 빛이 있었기 때문이고, 미정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함께함으로써 부족한 부분이 채워지고 비로소 완전체가 되어 세상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나갈 용기를 얻게 되는 것, 이게 바로 사랑.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하고, 사랑은 사람에게 용기를 건넨다. 미정의 지난 날은 동료들의 온갖 놀림과 핍박에도 꿈틀거릴 수 없었다. 그럴 용기가 없었고, 혹여 있다 해도 스스로 포기하곤 했다. 하지만 경록과의 사랑이 시작된 뒤로는 180도 달라진다. 경록을 짝사랑하며 미정에게 몹쓸 짓을 일삼아 온 백화점 명품관 직원 현지(한유은). 그녀가 또 다시 미정을 놀리며 괴롭히자 '너만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말라'며 일침을 가한다. 이런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경록으로부터 받은 밝은 빛 덕분이다. 

 

영화 <파반느>의 한 장면 ©넷플릭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21세기를 가리키는 듯한데, 아스라해져 가는 추억의 불씨를 되살리는 복고풍의 장치들, 이를테면 클래식 전문 채널 93.1메가헤르쯔라던가, 켄터키 호프집, 그리고 LP가게 등이 감각적 연출과 더해져 영화에 감칠맛을 더한다. 전형적인 내향인이자 스스로 고립을 택한 뒤 자신만의 색깔로 세상의 여백을 칠해 나가는 미정 캐릭터. 꾹꾹 눌러 담은 감정이 새어나가지 못 하도록 극도로 자제하는 고아성 배우의 내면 연기가 이를 훌륭히 소화해낸다. 

 

영화 <파반느>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눈물 쏙 빼는 신파극은 더더욱 아니다. 외피는 멜로물이지만, 실제로는 삶을 이야기한다. 내면보다 외피에 집착하는 요즘 시대의 흐름에 제대로 역행하는 묘한 작품이다. 그래서 매력적이다. 영원할 수는 없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에게 빛이 되어 주어 언젠가 다시 만나기를 꿈꾸며 살아가게 하는 그 무엇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아미고, 당신이 지금 만약 이런 사랑을 하고 있다면, 그 힘으로 세상 어떤 역경도 모두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거예요.

 

 

감독  이종필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