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이 가냘픈 소년이 걷는 터널 끝엔 무엇이 있을까.. 영화 <검은 소년>

새 날 2024. 6. 4.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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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훈(안진호)은 작가가 꿈이다. 그에겐 소박한 바람 하나가 있다. 생이별 중인 엄마 소연(윤유선)이 자신의 곁에 머물면서 좀 더 자주 보게 되는 일이다. 훈은 틈만 나면 공중전화부스로 향했다. 소연과 통화하기 위해서다. 아빠 무진(안내상)의 눈을 피해 주로 학교에서 이용하곤 했다. 훈은 그날도 여느 때처럼 공중전화부스로 향했다. 연락이 닿지 않아 평소보다 더욱 자주 들락거린 듯하다.

 

 

소연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근래 도통 통화가 되지 않아 훈의 마음은 좌불안석이다. 우여곡절 끝에 소연과의 통화에 성공하는 훈. 잘 있단다. 순간 얼굴에 화색이 돈다. 소연을 염려하는 훈의 마음과 훈을 걱정하는 소연의 마음이 동시에 맞닿은 걸까. 따듯하다. 집으로 향하는 훈의 발걸음도 한층 가벼워졌다. 모처럼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아서. 술에 취해 귀가한 무진이 훈에게 엄마의 소재를 캐묻기 이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아빠와 아들 사이, 일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영화 <검은 소년>은 엄마 아빠의 별거로 마음 기댈 곳 없었던 소년의 방황 심리를 섬세한 시선으로 스크린에 옮긴 작품이다. KAFA(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영화과정 출신 서정원 감독의 데뷔작이다.

 

무진은 알콜 중독자이자 분노조절장애를 앓고 있다. 소연이 무진의 곁을 떠난 것도 이 때문이다. 무진은 술에 취해 있기만 하면 아들에게 소연의 소재를 다그쳤다. 그럴 때마다 훈은 얼버무리며 간신히 아빠의 추궁을 피해갔지만, 이날만큼은 달랐다. 공인중개사였던 무진의 직업적 본능에 의해 소연의 소재가 파악된 것이다. 무진은 아들과의 심한 몸싸움과 추격전 끝에 결국 소연의 연락처를 알아내는 데 성공한다. 

 

무진이 소연에게 연락을 취하고 두 사람이 만난 뒤 잇따라 벌어지는 사건은 왜 소연이 무진의 곁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엄마를 가까이 둘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또 다시 놓쳐버린 훈. 그의 좌절은 단순한 화를 넘어 점차 분노로 탈바꿈하기 시작한다.

 

 

훈이 유일하게 흉금을 터놓고 지내는 절친 병태(엄지성)네 가족은 최근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아빠가 생활고로 집에 들어올 수 없는 처지. 병태는 훈이 현재 처한 상황을 익히 알지만, 적어도 자신처럼 경제적 어려움만큼은 겪지 않는다는 점이 부러웠다. 반면 훈의 시선으로는 빠듯한 살림살이 속에서도 엄마와 누나 등 가족끼리 복닥거리며 사는 병태 가족의 모습이 마냥 부러웠다. 상대적 결핍을 부러워하는 건 어쩌면 인지상정.

 

마음 붙일 곳 없는 가정을 벗어나 외부로 시선을 돌려 봐도 훈을 반기는 곳은 없었다. 학교 수업은 머릿속에 좀처럼 들어오지 않았고, 최근에는 교내에서 친구들을 거느리며 이른바 일진 노릇을 하는 동급생 기철(노태엽)이 자신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사소한 시비에서 비롯된 둘의 관계는 점차 기싸움으로 변질돼 갔다. 가정 내 불화로 가뜩이나 신경이 곤두서 있던 훈에게 양아치 기질이 있는 기철의 성가신 도발은 점차 훈의 자제력을 잃게 만든다.

 

 

훈에게는 평소 수첩과 필기구를 늘 몸에 지니며 생각나는 문구나 책에서 길어올린 좋은 글귀를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다. 작가가 꿈인 그에겐 어쩌면 유일한 희망의 몸짓이었을지도. 그가 주로 생활하는 집과 학교로부터 외면 받고 있는 사이 병태의 소개로 가입하게 된 독서 동아리는 그가 정을 붙일 수 있었던 마지막 숨구멍이었다. 이곳에서 감성 풍부한 독서광 안연희(신세휘)를 만나게 된 건 천운.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훈은 이곳에서도 퇴출되고 만다. 최근 그가 경험한 일련의 사건들 탓이다.

 

훈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가정에서는 엄마 아빠의 갈등으로 더 이상 마음 기댈 곳이 없게 됐고, 학교에서는 동급생의 괴롭힘으로 인내심이 바닥을 향해 가는 중이다. 그가 마지막 안식처로 여겼던 독서 동아리마저도 그를 외면했다. 유일하게 훈을 반기는 건 이미 어둠의 세계를 맛본 동급생 기철뿐. 더 이상 쏟아낼 좌절도 분노도 없을 만큼 정신적 탕진 상태에 이른 훈. 그가 현재 터벅터벅 걷고 있는 어두운 터널 끝에는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영화는 어린 나이 홀로 감당하기엔 벅찬 현실과 마주한 훈의 심적 변화를 미세한 움직임조차 놓칠 수 없다는 듯 현미경처럼 샅샅이 훑는다. 시종일관 안정감 있게 극을 끌고 나간 배우 안내상과 윤유선 덕분에 안진호의 연기는 날개를 단다. 안진호는 고립감 속에서 좌절과 혼돈을 감내하는 훈의 내면을 섬세한 연기력으로 승화해냈다. 앞으로가 기대되는 배우이다. 

 

엄마와 아빠는 훈에게 오직 자신만 생각하라며 타이르지만, 정작 훈이 원하는 게 무언지 아무도 묻지 않는다. 두 사람의 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달으면서 훈의 고립은 더욱 깊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훈은 무진을 떠나 소연에게 오라는 청을 완곡히 거절하고,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무진의 곁을 끝까지 지킨다. 가족의 소중함이 절실한 훈에게 아빠와의 동거란, 어쩌면 유일하게 남은, 가족을 이을 일말의 가능성 같은 것이었다. 훈은 무책임한 어른보다 마음 씀씀이가 깊은 아이였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997년 외환위기 무렵이다. 훈의 절친 병태 가정처럼 수많은 이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호소하던 시절이다. 영화 <검은 소년>은 열린 결말로 끝을 맺지만, 결국 희망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비록 지금은 어두운 터널을 힘겹게 지나가고 있고, 기철로 상징되는 검은 유혹이 그를 계속해서 도발하지만, 그 어려웠다던 환란 시절을 어떻게든 헤쳐나온 서민들처럼 결국 훈은 모든 걸 떨쳐내고 터널 끝을 웃으면서 빠져나올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감독  서정원

 

* 이미지 출처 : (주)트리플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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