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맨몸으로 불의에 맞선 소녀.. 영화 <불도저에 탄 소녀>

새 날 2024. 6. 10.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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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그만두고 세상에 마치 저 혼자만 존재하는 양 거친 방식으로 살아온 혜영(김혜윤)에게 어느 날 걸려온 전화 한 통. 그녀의 아버지 본진(박혁권)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내용이다. 본진은 며칠 전에도 일하던 도중 화상을 입었던 터라 혜영의 가슴은 다시 한 번 철렁 내려 앉는다. 다급히 병원을 찾은 혜영. 그녀가 맞닥뜨린 건 의식을 잃은 채 병원 침대 위에 무심히 누워 있는 본진의 몸뚱어리였다.

 

 

사고 피해자들이 거액의 합의금을 요구해 오는 상황. 평소처럼 악다구니를 써가며 과한 몸짓으로 이 상황을 벗어나려 애써 보지만 혜영 스스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마냥 이럴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혜영과 본진 그리고 동생 혜적(박시우)의 보금자리이자 본진이 운영해오던 중국집마저 누군가의 수중에 넘어가게 됐다. 도대체 그녀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영화 <불도저에 탄 소녀>는 맨몸으로 불의에 맞선 한 소녀의 이야기다. 아버지가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한 뒤 의혹을 캐는 과정에서 한 정치인의 파렴치한 계략이 드러나고, 어느새 괴물로 변모한 그와 싸워 나가는 과정을 그렸다. 한국종합예술학교 영상원에서 연출 과정을 수료한 박이웅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제58회 대종상 시상식에서 혜영 역의 김혜윤이 신인여우상을, 박이웅 감독이 신인감독상을 각각 수상했다.

 

혜영은 본진이 일으킨 사고 현장을 방문,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흔적을 훑으며 차근차근 사건을 되짚어 본다. 더불어 사고 피해자들을 만나 당시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캐물으며 흩어진 퍼즐 조각을 차례로 맞춰 나간다. 그녀가 사건을 깊숙이 파헤칠수록 신기하게도 특정 인물이 자꾸만 거론되고 있었다. 바로 본진의 사업에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진 최영환(오만석) 회장이었다. 

 

 

경마와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아내마저 먼저 떠나보낸 본진에게 최 회장은 구세주 같은 존재였다. 그의 배려 덕분에 본진의 세 가족은 중국집을 운영하며 동시에 살림까지 꾸려나갈 수 있었다. 그랬던 최 회장이 본진의 교통사고 즈음, 돌연 가게를 비우라고 지시한 것이다. 본진과 최 회장 사이엔 모종의 사건이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게 무얼까.

 

혜영이 발품을 직접 파는 등 고군분투 끝에 사건은 조금씩 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진실. 순간 혜영의 분노가 들끓어 오른다.

 

 

영화 속 악당은 그럴싸한 포장지로 감싸져 있으나 본질은 악취가 진동하는 캐릭터의 전형이다. 능력이 출중한 데다 약자에게 관대하기까지 한 유력 정치인의 연출된 성품 이면엔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함과 천박함이라는 성정이 배어 있다. 대부분의 약자들은 극 중 영혜의 이모부처럼 보복이 두려운 데다 짓이겨오는 삶의 무게로 인해 이를 알면서도 묵인하기 일쑤이며, 그 사이 부와 권력을 손에 쥔 악당은 약자의 속성을 꿰뚫고 교묘히 이를 악용한다.

 

 

아직은 학교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아 마땅한 소녀 혜영. 그녀가 울타리 밖으로 월담했다. 이제 그녀를 보호해 주는 건 사회도 학교도 가정도 아닌 오직 자신뿐. 그런 그녀는 직진밖에 모르는 캐릭터다. 그녀에게 우회로란 존재하지 않는다. 퇴로는 더더욱 없다. 가진 건 한쪽 팔을 가득 채운 문신과 두둑한 배짱뿐. 폭발한 분노는 정확히 한 사람을 표적으로 한다. 그가 누가 됐든 그녀가 가는 길엔 주저함이란 없다. 기어코 목표물로 돌진, 상대를 확실하게 응징하고야 만다. 

 

찰진 욕설과 주눅들지 않는 당돌함을 캐릭터에 고스란히 녹여낸 김혜윤이라는 배우의 쓸모는 눈여겨 볼 대목이다. 불의에 맞서 앞뒤 가리지 않고 내달리는 저돌적인 캐릭터는 화끈하다 못해 통쾌하다. 관객의 갈증 호소에 사이다로 화답하는 감독. 경찰서에서 또 왔냐며 혜영의 머리를 이유 없이 한 대 쥐어박고 지나가는 형사를 향해 그녀가 뒤쫓아가 맞받아칠 때의 쾌감은 관객이 바라는 일종의 대리욕구 같은 것. 뻔한 스토리의 전개 속에서도 이 영화가 반짝반짝 빛나는 이유다.

 

 

 

감독  박이웅

 

* 이미지 출처 : 트윈플러스파트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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