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글은 무엇보다 강하다... 영화 <9명의 번역가>

새 날 2024. 6. 26. 17:54
반응형

베스트셀러 시리즈물인 '디덜러스'의 마지막 편이 완성되어 출간을 앞두고 있다. 이번 프로젝트의 진행을 맡아 총괄 지휘에 나선 에릭(랑베르 윌슨)은 해당 도서를 총 9개의 언어로 번역하여 전 세계에 동시 출간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영어, 독일어, 중국어 등 각기 다른 언어 번역가 9명이 긴급 공수되어 프랑스 모처로 불러들여진다.

 

 

번역가들이 머무르게 될 공간은 외부와 완벽히 차단된, 일종의 밀실. 러시아 국적 보안 요원들에 의한 삼엄한 경계가 펼쳐지고 내부 직원들의 촘촘한 감시 활동까지 더해진 통제 시스템 속에서 번역가들은 두 달 동안 숙식을 하며 번역 작업을 마무리하게 된다. 도서 내용의 사전 유출을 막기 위한 조치다.

 

그러던 어느 날, 에릭의 휴대폰으로 메시지 한 통이 배달된다. '수 시간 내로 계좌에 현금을 입금하지 않을 경우 도서 내용을 공개하겠다'는 협박이었다. 철저히 통제된 밀실. 그곳에선 9명의 번역가가 작업 중이었고, 도서 내용을 아는 이는 작가 및 에릭을 제외하면 그들이 유일한 상황, 그렇다면 유출범은 외부가 아닌 밀실 내부에 존재한다는 의미. 과연 범인은 누구일까.

 

 

영화 <9명의 번역가>는 베스트셀러 시리즈물의 마지막 편 출간을 앞두고 극비리에 진행되던 번역 작업 도중 도서 내용이 외부로 유출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미스터리물이다. 밀실이 주된 공간적 배경으로, 스릴러적 요소가 더해지면서 긴장감을 극대화한다. 

 

번역가들이 머물던 작업실은 일순간 충격과 공포의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에릭의 심기가 몹시 불편해진 상황, 유출범 색출이라는 명분으로 번역가들에게 린치가 가해지고. 이 상황을 감내하기 힘들수록 서로 간의 갈등과 불신은 덩달아 커진다. 에릭이 번역가들을 의심하며 그들에게 점차 칼 끝을 향해 갈 때, 동시에 같은 배를 탄 동료들은 서로를 향해 칼 끝을 겨눈다. 자칫 동료의 등 뒤에 칼을 꽂을 수도 있는 상황. 밀실은 이제 광기와 혼돈 그 자체다.

 

 

'디덜러스'의 번역 작업에 동원된 9명은 해당 언어의 번역가들 중에서 가장 평판이 좋은 실력파들. 그들이 이번 번역 작업에 참여한 이유는 국적만큼이나 다양하다. 해당 소설 자체에 매료되어 참가한 이가 있는가 하면, 당장의 경제적 궁핍 해소를 위해 함께한 이들도 있었다.

 

에릭은 앞서 두 차례의 출판 과정을 통해 '디덜러스'를 일약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키워낸 인물이다. 그동안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을 처리해 온 탓에 주변인들로부터 '책을 치약처럼 팔고 있다'는 비아냥을 듣곤 했다. 에릭은 매우 간교하고 잔혹한 캐릭터로 그려진다. 특별히 덴마크어 번역가 헬렌(시드세 바벳 크누드센)을 향해 저지른 끔찍한 만행은 그가 어떤 류의 캐릭터인가를 여실히 드러낸다.

 

 

가부장적 남편을 만나 일찌감치 작가의 꿈을 내려놓은 헬렌. 그녀는 번역이라는 직업을 대안으로 택하였으나 작가의 꿈을 포기하게 된 현실이 개탄스럽다고 동료들에게 귀띔해 왔다. 에릭이 헬렌을 향해 글 쓰는 재능이 없다고 조롱하며 벽난로의 땔감으로 태워버린 손글씨 가득한 노트는, 다름 아닌 그녀가 무려 8년 동안이나 밤잠을 줄이고 고심하며 틈틈이 창작해놓은 자작 소설이었다.

 

타인의 꿈을 무참히 짓밟은 에릭. 오로지 활자로만 구성된 상품을 전 세계에 판매하는 이런 인물이 정작 활자를 번역하여 이야기로 꾸미고 상품화하는 사람들을 무례하고 잔혹하게 다루는 아이러니란. 하지만 그의 악행이 도드라질수록 활자는 그 고유의 가치를 더욱 공고히 하게 된다. 

 

 

영화는 사건 발생 수 개월 뒤 에릭이 소설 유출범으로 추정되는 인물과 마주앉아 대화하는 장면, 그리고 사건 진행 과정 장면을 번갈아 스크린 위에 나열한다. 통제된 공간, 한정된 인물이 직조해내는 밀실 미스터리의 팽팽한 분위기 속에서 관객은 자연스레 범인이 누구인지를 예측하게 된다. 빠른 템포와 긴장감 있는 극의 전개는 추리극으로써의 공식에 충실히 따르며, 동시에 감독은 번역가와 작가 등 활자를 다루는 모든 이들의 수고로움에 깊은 애정을 드러낸다.

 

영화 <9명의 번역가>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아온 번역가들을 향한 일종의 헌사다. 더불어 '책 속에 찬란한 지식이 있으며, 글은 무엇보다 강하고 기어코 남는다'는 메시지를 통해 활자에 깃든 가치를 새삼 일깨운다.

 

 

감독  레지 루앙사르

 

* 이미지 출처 : (주)이놀미디어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