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17일 전남 광주.
평생을 중식 요리에 몸 담아온 철수 할아버지(강신일)가 자신의 중국집을 개업했다. 식당 이름은 '화평반점'. 철수 엄마(김규리)와 아빠(이정우), 삼촌(백성현), 그리고 이모(민서)까지, 모든 가족이 발벗고 나서서 바쁜 개업 일손을 돕는다. 평판이 좋고 요리 솜씨가 뛰어난 덕분에 식당은 연일 문전성시다. 며칠 뒤 한 무리의 군인이 식사를 위해 화평반점에 들어선다. 그 무렵 광주 시내에서는 연일 군중집회가 개최된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계엄령이 선포돼 무장군인까지 투입되는 등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화평반점 사람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시민들은 작금의 상황이 자신과는 거리가 멀다고 여긴 탓에 느닷없는 군인 무리의 등장은 식당 주변을 금세 술렁거리게 했다. 광주는 하루가 다르게 급박한 상황으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마을 어귀에만 나가도 시위대를 쉽게 만날 만큼 항쟁이 확산일로로 접어들던 시기. 시위의 배후로 수배 중이던 철수 아빠가 몰래 숨어든 식당이며 집까지 군경이 갑자기 들이닥친 건 바로 그즈음이다.
영화 <1980>은 광주에서 식당을 개업한 가족과 그 이웃들이 부지불식간 시민 항쟁에 휩쓸리게 되는 이야기를 그렸다. 실재했던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전두환 일당에 의해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나고 불과 5개월 만에 전남 광주는 완전히 고립된다. 무너진 일상과 이웃, 그리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평범한 시민들이 거리로 나섰다. 영화는 그 치열하고 긴박했던 순간을 화평반점 가족의 비극으로 옮겨온다.
철수 아빠 사건이 있은 지 얼마 후, 이번에는 시위대와 그들을 쫓는 계엄군 무리가 화평반점으로 들이닥친다. 시위대는 다름 아닌 동네에서 형 동생 사이로 서로 알고 지내오던 친근한 이웃들. '빨갱이'라는 지칭과 함께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행이 이들에게 자행되고, 보다 못한 철수 삼촌이 계엄군의 앞을 가로막아 서지만, 그 역시 '빨갱이' 낙인을 피해가지 못 한 채 곤봉 세례와 함께 어디론가 끌려 나간다.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황.
비극의 서막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와 결혼을 앞둔 연인은 계엄군에 의해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온다. 절친한 이웃들이 원인도 모른 채 계엄군에 의해 희생되거나 무자비한 폭행을 당하고, 어느새 계엄군의 총부리가 자신에게까지 겨누어 오는 지옥 같은 현실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신군부세력이 장악한 언론과 각종 매체는 시위대를 향해 연일 '빨갱이' 내지 '폭도'라 지칭하며 낙인을 찍어 분리시키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신군부세력의 조급증은 계엄군의 잔인한 진압 형태로 발현돼 갔다. 광주 시민들의 저항도 그에 따라 시간이 갈수록 더욱 격렬해졌다.
영화는 1980년 5월 광주 도시 전체가 외부와 단절된 채 핏빛으로 물들어 갈 당시 평범한 소시민들이 어떻게 투사로 변모해 갔으며, 이웃의 어려움에는 어떤 방식으로 의연하게 대처했는지를 묵묵히 그려 나간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주요 변곡점마다 실제 현장 스틸 사진과 영상을 배치, 설명을 곁들이며 사실성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관객의 이해를 돕는다.
영화 <안시성>, <판도라>, <사도> 등에서 미술감독을 담당했던 강승용 감독의 데뷔작이다. 1980년 당시의 광주 모습이 잘 재현된 배경일 듯.
우리 사회엔 여전히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갖는 의의와 실체적 진실을 왜곡하고 폄훼하려는 세력이 존재한다. 영화 <1980>은 화평반점 사람들을 통해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위를 주도하거나 참여한 이들이 빨갱이나 폭도가 아닌, 우리처럼 평범한 소시민들의 자발적인 항거였음을 힘주어 이야기한다.
화평반점은 5월 광주의 축소판이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항쟁 참여와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은 시대정신이 잘 녹아들어 있다. 자기 희생을 통해 암울한 시대를 스스로 혁파해 나간 사람들의 용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감독 강승용
* 이미지 출처 :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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