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저냥

내가 전철에서 이어폰을 사용하는 이유

새 날 2019. 12. 16. 18:20
반응형

며칠 전의 일이다. 전철역에 있는 무인 도서 대여 기계를 이용하여 책을 빌리고 있었다. 장바구니에 이미 책 세 권을 담아둔 상태였고, 한 권을 더 빌리기 위해 스크린을 이용하여 검색하던 찰나였다. 20대쯤 되어 보이는 한 여성이 내게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도서 반납 시간이 임박해서 그러는데 자신의 책을 먼저 반납하면 안 되겠느냐”고 묻는다. 


도서 대여 절차가 거의 끝나가는 순간, 이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것을 먼저 처리하겠노라는 속내를 떳떳이 밝힌 이 여성의 발칙한(?) 행동엔 주저함 따위는 전혀 없었다. 당당했다. 오히려 당황한 건 내 쪽이었다. 나는 거의 마지막 단계에 놓인 도서 대여 절차를 포기하고 그녀에게 양보해야 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하던 작업을 계속해서 마무리해야 하는지, 정확히 10초 동안 고민해야 했다. 


물론 다 된 밥에 재를 뿌려선 안 될 것 같기에 나는 후자를 택했다. 하지만 내 등 뒤에서 나의 행동을 예의주시하며 재촉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던 그녀로 인해 한 권 더 빌리려던 애초의 계획은 포기해야 했고, 결국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던 도서 세 권만을 빌리고 말았다. 기계에서 나온 책을 받아 든 나는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괜스레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쫓기듯 그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이윽고 전철에 올라탔다. 빈 자리는 없었다. 서 있을 곳을 물색했다. 통로를 오가는 승객은 물론 나 역시 불편을 느끼지 않을 법한 위치에 가서 섰다. 두 개역쯤 통과할 무렵이었다. 처음엔 의식을 못했으나 자꾸만 나의 신경을 거슬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내가 선 위치 바로 옆에는 한 여성이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는데, 길게 뻗은 발이 나의 다리에 닿을 듯 말 듯한 상황이었다. 


나는 그녀의 발 때문에 잔뜩 긴장하고 서 있는데, 그녀는 오히려 무심한 표정으로 휴대폰 화면만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전철을 이용하다 보면 이렇듯 다리를 꼬고 앉는 이들을 간혹 만나게 된다. 매우 흔한 모습 가운데 하나다. 이러한 행위는 자신을 이롭게 할지는 몰라도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당연히 지양해야 하는 행위다. 


이런 사람들을 보게 되면 내겐 괘씸함보다는 안타까운 감정이 먼저 밀려든다.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결과적으로는 다리를 꼬고 앉음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자신 앞에 서지 못하도록 막아선 셈 아닌가. 그러니까 이런 자세를 취한다는 건 타인의 접근을 암묵적으로, 아니 대놓고 막겠노라는 의지의 피력이다. 이는 타인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소통하지 않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때문에 사실 난 이런 분들이 몹시 안쓰럽다.


이날따라 객차 안에는 큰 목소리로 떠드는 승객들도 많았다. 여럿이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상황임에도 소음에 의한 공기의 떨림 현상은 큰 진폭을 그리며 나의 고막을 끊임없이 자극해왔다. 나는 소음이 몹시도 괴로운 입장이었는데, 신기한 건 객차 안 대부분의 승객들은 그다지 개의치 않은 표정으로 휴대폰 화면에만 집중하는 모양새였다. 


ⓒpixabay


덕분에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볼 기회가 생겼다. 많은 수의 승객 귀에는 유무선을 망라한 다양한 종류의 이어폰이 꽂혀 있었다. 이제야 조금 알 것도 같았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승객들은 이어폰을 통해 특정 콘텐츠를 소비하는 와중이라 누군가 큰 소리로 떠들든 말든 관심 밖의 일이었던 셈이다. 


목소리 큰 승객의 전화 통화는 끝날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몇 개 역을 지나는 동안에도 자신의 집 안방처럼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난 대개의 승객들처럼 가방에 있던 이어폰을 꺼내 내 양쪽 귀에 꽂았다. 이제야 평화가 찾아온 느낌이다.


이어폰, 무선 기술과 결합한 이래 정말 하루가 멀다 하고 한층 진화된 성능의 제품들이 시장에 쏟아지고 있다. 이어폰은 휴대폰을 매개로 누군가와의 통화를 돕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사람과의 관계를 증진시키고 소통을 도모하는 기능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언제 어디서든 영상이나 음향 콘텐츠를 은밀히 소비 가능케 함으로써 타인과의 소통을 방해하는 기능도 갖췄다.


내가 이어폰을 귀에 꽂은 건 통화를 하거나 음악을 듣고 싶어서라기보다 시끄러운 소음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그러니까 세상의 번잡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의도적으로 소통을 피하고자 하는 의지의 발현이다. 



‘포노 사피엔스’로 불릴 정도로 요즘 사람들은 휴대폰이라는 기기에 흠뻑 빠져 산다. 휴대폰은 지극히 사적인 물건이다. 이것으로 어떤 작업을 하든 거기에 몰두하는 건 매우 개인화된 일상 가운데 하나다. 가뜩이나 이기주의 그리고 개인주의가 득세하고 팽배한 시대에 휴대폰이라는 기기는 개인의 개별성을 더욱 확장시킨다.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소통 도구도 괄목할 만한 수준으로 늘어났고, 덕분에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거미줄처럼 촘촘히 연결돼 있다. 그러나 예전보다 소통이 양적으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외로움을 크게 호소해야 하는 실정이다. 왜일까? 앞서 내가 경험한 사례들처럼 과도한 개별성으로 인해 주변의 사람들을 살피지 않는, 존중과 배려가 실종된 행동 양식 하나하나가 관행으로 점차 자리 잡으면서 우리의 발목을 스스로 잡고 있기 때문은 아닐는지.. 


목적지 역에 도착한 나는 역사를 조용히 빠져나왔다. 귀에는 여전히 이어폰이 꽂혀진 채로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앞에서 한 쌍의 남녀가 느닷없이 내 앞을 가로 막아서더니, 뭐라고 말을 한다. 물론 이어폰 때문에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난 그들의 정체를 알 것도 같았다. 특정 종교를 마케팅하는 이들이었다. 이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난 이어폰 덕분에 현장을 유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아하, 이어폰이 이럴 땐 또 무척 요긴하구나.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