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지금 여기의 삶에 충실하자 '수상한 교수'

새 날 2019. 8. 10.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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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학 교수 리차드(조니 뎁)의 기행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갔다. 수업을 휴강으로 처리하는 날이 다반사였으며, 강의실에서 제자들과 함께 담배를 피우는 일도 예사였다. 심지어 캠퍼스 잔디밭에 제자들과 빙 둘러앉아 마리화나를 피우는 모습이 학교 총장인 헨리(론 리빙스턴)에게 발각되는 일도 있었다. 종신 재직권을 거머쥐고 있을 정도로 학교 내에서 영향력이 크고 자신의 역량을 인정받으며 승승장구하던 그였건만. 어쩌다 이토록 망가진 걸까?

그가 병원을 방문하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등에서 평소 감지하지 못했던 통증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리차드는 담당의사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듣게 된다. 폐암 4기인 데다 암세포가 등을 포함한 신체 곳곳으로 전이되어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내용이다. 6개월이라는 시한부 삶이 선고됐다. 어쩔 수 없이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 리차드, 울분을 토해내봤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리차드의 아내 베로니카(로즈마리 드윗)가 그에게 불륜 사실을 털어놓게 된다. 그녀의 불륜 상대, 알고 보면 끔찍하다. 하필이면 리차드의 직장 상사인 헨리였으니 말이다. 이쯤 되면 최악의 시나리오라 할 만했다. 딸은 또 어떤가. 레즈비언임을 커밍아웃하며 리차드와 베로니카의 영혼을 홀딱 빼놓는다. 이렇듯 복잡 미묘한 상황이었기에 리차드는 자신의 처지를 가족들에게 선뜻 털어놓을 수 없었다.



영화 <수상한 교수>는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교수 리차드가 곧 죽음에 이른다는 사실을 어렵게 받아들인 뒤,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삶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스크린에 옮긴 작품이다.



리차드는 제자들을 술집으로 불러 모아 함께 술을 마시던 도중 여종업원과 눈이 맞아 화장실에서 애정 행각을 벌인다. 같은 시각, 그의 아내 베로니카는 모텔에서 불륜상대인 헨리와 한 침대에 누워 있다. 그의 딸은 그녀대로 집에서 동성의 연인과 뜨겁게 사랑을 나누던 참이다.



시한부의 삶과 함께 그 앞에 불현 듯 다가온 뜨악한 현실은 무엇 하나 녹록한 게 없다. 이쯤 되면 총체적 난국이라 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차드의 일상은 짐짓 쿨하다. 내면은 혼돈과 두려움에 갈기갈기 찢길지언정, 이를 기행으로 승화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적어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기로 작정한 듯싶다. 리차드는 단 한 번뿐인 삶,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해봐야 한다며 제자들에게 이를 설파하고 몸소 실천으로 옮긴다. ‘지금 여기’에서의 시간을 허투루 소비하지 않기 위해 죽음과 친해지라는 조언도 잊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죽움을 맞이하는 시기는 사람들마다 제각기 다를지언정 이는 변치 않는 명제다. 지금 이 시각에도 모두들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를 굳이 내색하지 않을 뿐이다. 리차드처럼 어느 날 갑자기 시한부 삶을 선고받을 수도 있다. 리차드가 결코 특별한 사람이라 그런 게 아니다. 당신이나 나나 오늘 당장 시한부 삶을 선고받아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세상이다. 물론 그러한 사례는 우리 주변에서도 간간이 일어나고 있다.



영화는 소소한 웃음거리를 던져주긴 하지만, 대체로 큰 기복 없이 흘러간다. 때문에 무언가 대단한 재미를 바란 분들에게는 다소 지루하거나 실망스럽게 다가올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자칫 칙칙해지거나 어두워질 수 있는, 그도 아니면 신파로 마무리될 법한 소재를 시종일관 밝고 쿨하게 연출한 감독의 의도는 썩 바람직한 대목이다.



리차드의 마지막 선택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설왕설래할 것으로 짐작된다. 그만큼 민감한 사안이다. 가벼운 톤으로 연출하고 있으나 이렇듯 묵직한 주제를 다룸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한 차원 더 깊은 생각을 이끌어내게 하는 작품이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만큼은 애써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거나 의도적으로 이를 회피하게 된다. 하지만 종국에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게 바로 죽음이다. 이 영화는 죽음이 결코 멀리 있는 게 아니기에 ‘지금 여기’의 삶에 더 충실해야 하며, 일종의 금기인 죽음을 우리 곁으로 조금 더 깊숙이 끌어당겨 생각해보게끔 하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죽음이 우리 곁에서 늘 배회한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삶을 더 열심히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으로 다가오기에 충분하다.



감독  웨인 로버츠  


* 이미지 출처 : ㈜제이앤씨미디어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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