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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믿고 있는 건 과연 진실일까? '세 번째 살인'

새 날 2019. 6. 15.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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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살인을 저지른 미스미(야쿠쇼 코지). 그는 자신이 일하던 공장 사장을 죽인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강도살인죄였다. 미스미는 사장의 돈을 노리고 우발적으로 살해했다고 자백한다. 혐의가 사실로 밝혀진다면 사형을 면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변호사 시게모리(후쿠야마 마사하루)가 미스미의 변론을 위해 투입된다.

시게모리는 미스미의 형을 감형시키기 위해 치밀한 변호 전략을 세운다. 돈을 훔치기 위해 살해한 게 아니라 살해한 뒤 돈을 훔치려 한 사실을 법정에서 내세워, 강도 살인이 아닌 단순 살인 및 절도 혐의가 적용될 수 있도록 사전에 입을 맞춘 것이다. 또 다른 전략으로는 한 주간지가 보도한 사실을 근거로 사장의 부인 미츠에(사이토 유키)가 남편이 가입한 보험의 보험금을 노리고 그에게 청부 살해를 의뢰한 것으로 짜 맞춘다.

하지만 돌발 변수가 발생한다. 살해된 공장 사장의 딸 시키에(히로세 스즈)가 아버지와 얽힌 어두운 과거를 폭로하면서 법정에서 이를 증언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스미마저 죽은 공장 사장을 자신이 살해하지 않았다며 자백을 번복하고 나섰다. 이로 인해 양형 판결을 앞둔 이번 사건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죄의 유무부터 다시 다퉈야 할 판이었다.



진실을 외면해온 변호사.. 그를 공포에 떨게 한 것

영화 <세 번째 살인>은 진실 추구보다 재판에서의 승리만을 뒤쫓던 변호사 시게모리가 자신을 해고한 공장 사장에 앙심을 품고 살해, 사형이 거의 확실시되는 미스미의 변호를 맡아 점차 사건의 진실에 접근해간다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극 중 시게모리는 재판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진실보다 의뢰인에게 유리한 방향을 선택하고 전략을 짜는 냉철한 캐릭터로 묘사돼있다. 그가 내세워온 철학은 명확했다. 법정은 진실을 해명하는 장소가 아니라는 게 평소 그의 신념이다.



시게모리의 이러한 성향은 사건 담당 검사와의 대화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그는 검사에게 “검찰이 무턱대고 혐의를 단정한 것 아니냐”고 묻는다. 그러자 검사는 시게모리에게 “당신은 오직 감형 생각밖에 없지 않느냐”며 반문한다. 자신은 변호사니까 당연하다고 답하는 시게모리. 그에게 검사는 “진실을 외면하는 건 범인이 죄와 마주하는 걸 방해하는 것”이라고 일갈한다.

극 중 미스미는 자신의 범죄 행위에 대해 진술을 끊임없이 번복하면서 시게모리는 물론이며 관객들로 하여금 과연 무엇이 진실인지 혼돈 속으로 빠트린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 벌인 범행에 대해 깊이 반성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다가도, 또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 죽이지 않았다며 발뺌하거나 그와는 반대로 자신이 죽인 이유를 알고 싶지 않느냐며 반문하곤 했다.



똑같이 사람을 죽였음에도 법의 속성상 그 원인에 따라 형량은 달라지게 마련이다. 가령 원한에 의한 살해와 금전 관계에 의한 살해를 놓고 법의 잣대로 그 경중을 저울질할 경우 결과적으로 사람을 죽인 건 마찬가지임에도 금전 목적의 살해가 더 무겁게 받아들여진다. 원한은 살해를 유발한 만한 동기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사람이 사람을 판가름해야 하는 상황. 진실조차 명확하지 않은데 누가 누구를 심판하고, 더구나 잣대마저도 모호한 현실은 법체계가 갖는 모순 그 자체일 것이다.

우리가 믿고 있는 건 과연 진실일까?

시게모리에게 있어 진실을 외면해온 대가는 혹독했다. 법정은 진실을 해명하는 장소가 아님을 공공연하게 밝히고, 평소 죽어 마땅하거나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던 시게모리. 그가 미스미와 마주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그의 신념에는 적지 않은 균열이 발생하고 있었다.



미스미의 진술 번복이 계속되고 진실이 무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가 스스로를 심판하려 했던 것인지 아니면 구원하려 했던 것인지 이마저도 종잡을 수 없게 된다. 진실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상황에서 누가 누구를 심판한다는 게 얼마나 공포스러운 결과물인지 접견실에서 미스미와 마주앉은 시게모리는 점차 텅 빈 그릇으로 다가오는 미스미를 통해 이를 또렷이 깨닫게 된다.



영화는 시종일관 어둡고 무거운 톤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배우들의 연기 또한 무채색 일색이다. 법정과 접견실 등 공간적 배경으로 쓰인 대부분의 장소는 묵직한 공기로 가득 들어찬 느낌이다.

우리가 믿고 있는 건 과연 진실일까? 혹시 시게모리의 딸이 눈물 연기를 통해 아버지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여 왔던 것처럼 평소 우리는 너무나 쉽게 진실을 외면해왔던 건 아닐까? 아울러 이처럼 진실이 모호한 현실 속에서 누군가를 심판해야 한다는 건 더더욱 모순이 아닐까?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 이미지 출처 : 티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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