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묵직한 메시지 '가버나움'

새 날 2019. 4. 8.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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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의 한 빈민가에서 태어난 자인(자인 알 라피아)은 부모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 자신이 몇 살인지조차 정확히 알지 못한다. 자인의 가정은 워낙 가난했던 까닭에 아이들의 학교 교육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저 어른들의 일손을 도와 허드렛일을 하며 하루를 소일해야 하는 처지였다. 방치된 또래 아이들은 어른들의 흉내를 내며 담배를 피우거나 마약을 만들어 내다 파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자인의 가족 수는 대체로 많은 편이었다. 덕분에 좁고 지저분한 환경에서 온 가족이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느라 집안은 늘 북새통이었다. 집 안팎으로는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떠드는 소리가 항상 끊이질 않고 있었다. 12살가량인 자인. 그의 아래로 형제가 여럿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자인은 바로 밑의 여동생 사하르(하이타 아이잠)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월세 등의 경제적 혜택을 빌미로 집 주인인 이웃에게 아직 11살에 불과한 사하르를 매매혼 시키려는 부모의 계획을 간파한 자인은 어떻게든 사하르를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던 어느 날, 허망하게도 사하르는 그 이웃에게 팔려가고 만다. 자인은 이를 막아보려 애썼으나 그 혼자서 어른들의 완력을 이겨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사하르를 떠나보낸 자인은 집을 뛰쳐나와 무작정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긴다.

영화 <가버나움>은 자신의 부모를 고소한 자인이 법정에 출두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영화는 사하르를 시집보내고 자인이 집을 뛰쳐나온 뒤 밖에서 겪게 되는 무수한 일들을 차근차근 짚으면서 12살에 불과한 자인이 왜 자신의 부모를 고소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득력 있게, 그리고 때로는 감동적으로 화면에 담아낸다.



피사체를 따라 이리저리, 그리고 끊임없이 흔들리던 화면은 자인을 둘러싸고 있는 어지러운 환경과 자인의 고통스러운 속마음을 드러내려한 장치로 읽힌다.

자인이 집을 뛰쳐나간 뒤 인연을 맺게 된 사람은 놀이시설에서 일하고 있던 난민 신분의 라힐(요르다노스 시프로우)이었다. 그녀는 배를 곯은 채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던 자인을 거두어 자신의 집에서 함께 지내기 시작한다. 그녀에게는 이제 갓 돌을 지났을까 말까 한 어린 아기 요나스가 있었다. 그녀는 자인에게 요나스의 돌봄을 맡기고 일을 다녀왔다. 천방지축일 것 같은 자인은 의외로 아기를 동생처럼 살뜰히 보살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상시와 다름없이 일을 나간 라힐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날 때까지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건만 그녀는 돌아올 줄을 몰랐다. 당장 배가 고팠던 자인은 요나스를 안고 라힐을 수소문하기 위해 무작정 거리로 나선다. 하지만 그녀의 행방은 묘연했다. 삶을 향한 자인의 지난한 사투는 이때부터 본격 시작된다.

당장 요나스의 먹거리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던 자인은 집에 있던 물건들을 주섬주섬 챙겨 시장에 내다 팔거나 마약 주스를 만들어 팔기 시작한다. 요나스를 향한 자인의 마음씀씀이는 남달랐다. 집의 물탱크가 비어 수도꼭지에서는 녹물만 나오고 먹거리가 완전히 떨어지자 이웃의 아기가 먹던 우유를 빼앗아와서라도 요나스의 배를 곯지 않도록 자인은 부단히 애를 썼다.



아기가 울고 보챌 때마다 달래주었고, 그럴 때마다 자신의 덩치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요나스를 온몸으로 지탱하면서 힘겹게 버티는 자인의 모습은 안쓰러움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인은 불만의 기색 없이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마치 책임감 없는 자신의 부모나 어른들더러 일부러 보란 듯이 말이다. 이렇듯 자인의 행동에는 일관성이 있었다.

요나스는 자인의 가슴을 더듬으며 엄마의 빈자리에 대한 아쉬움을 달랬고, 자인은 옆집에서 흘러나오는 TV방송을 거울로 반사시켜 이를 바라보면서 각기 욕망을 해소하곤 했다. 온통 어수선하고 지저분함 일색인 자인의 생활권 밖으로 살짝 눈을 돌리면 잘 닦인 도로 위로 미끈한 승용차들이 줄지어 달리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천당과 지옥은 진정 한 끗 차이인 것일까?

열악한 환경 속으로 내쳐진 자인에게 퍼부어지는 부모의 무수한 발길질과 매질 그리고 욕설. 어느 누구보다 사랑받고 싶었고 존중받고 싶었던 자인은 “인생은 개똥 같아요. 내 신발보다 더러워요”라며 울부짖는다.



아이를 낳기만 하고 양육에 대한 책임을 등한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니면 그와는 반대로 아이에 대한 사랑이 너무 지나쳐 마치 자신의 소유물인 양 받아들이는 현대인들이 즐비하다. 자녀에게 사랑을 쏟고 존중해주기보다는 11살의 어린 딸을 매매혼으로 넘기고 그 딸이 죽자 또 다시 임신하여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게 되는 거야” 라고 무책임하게 말하던 엄마.

그녀 앞에서 “엄마의 말이 칼처럼 심장을 찌르네요”라고 맞받아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던 자인의 행동은 오늘날 자녀를 키우는 모든 이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이 영화가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감독  나딘 라바키


* 이미지 출처 : 세미콜론 스튜디오, 그린나래미디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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