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신분상승이냐 꿈이냐 '반도에 살어리랏다'

새 날 2019. 4. 11.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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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대학의 연기학과 시간강사로 일하는 오준구가 사실 진짜로 하고 싶었던 일은 가르침이 아닌 연기였다. 때문에 그는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내심 연기를 향한 꿈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준구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온다. 연예기획사에서 일하는 동기로부터 드라마 연기 제안을 받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다. 그가 근무하는 대학에서 정교수로 있는 최기호가 물러남과 동시에 오준구에게 정교수 일자리를 제안해온다. 둘도 없는 기회가 한꺼번에 찾아온 상황에서 오준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영화는 이때부터 오준구로 하여금 생계를 위한 선택을 할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선택할 것인지,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아슬아슬한 외줄타기의 상황 속으로 몰아넣은 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좇는다.


 

오준구는 40대의 중년 가장이다. 생활력이 강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속물근성이 다분하다고 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는 아내 그리고 아들, 딸과 함께 살고 있다. 젊었을 땐 멀쩡했던 그의 머리숱은 어느덧 숭숭 빠져버려 이마뿐 아니라 머리의 면적 대부분이 휑해져있는 참이다.

 

대학 시간강사는 학생들 입장이나 외부의 시선으로 볼 때 교수로 불리지만 현실은 지금 당장 잘려도 딱히 할 말이 없는 박봉의 비정규직에 해당한다. 오준구는 이렇듯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해 늘 자괴감을 안은 채 살아가고 있는 처지다. 때문에 오준구에게 느닷없이 찾아온 이번 기회는 천재일우라 할 만한 것이었다.

 


오준구는 신분상승 즉, 생계냐, 아니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냐를 놓고 열심히 저울질을 해보지만 결정이 여의치 않은 실정이다. 현실은 그더러 자꾸만 생계를 택하라 떠밀고 있으나, 그의 마음과 몸은 자연스레 좋아하는 일 쪽으로 기울어가는 참이니 말이다. 이렇듯 갈팡질팡하는 오준구를 어쩔 수 없이 생계 쪽으로 기울게 한 건 결국 주변 여건이었다.

 


때마침 아들 녀석이 일으킨 사고는 가뜩이나 없는 형편에 기천만 원이 요구되는 막다른 상황 속으로 그를 강제로 떠민 격이며, 아내는 남편이 정교수가 된다는 소식에 반색한 채 학군이 뛰어난 비싼 지역의 아파트를 덥석 계약하고 만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오준구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현실로 인해 꿈마저 방향을 틀어버리려는 딸을 향해 너만이라도 돈 생각하지 말고 진짜로 좋아하는 일을 하라며 다독이는 일이 전부였다. 자신이 이룰 수 없는 꿈을 자식 세대를 통해서라도 실현시켜 보려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바람을 영화는 오준구를 통해 대리 발현시키고 있었다.

 


오준구는 대학사회에 소속된 채 시간강사와 정교수 사이의 계층 차이를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동안 갑과 을이라는 수직적 질서 아래에서 단련된 채 살아온 그에게 신분상승이라는 제안은 거절하기 힘든 달콤한 유혹이었을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정작 하고 싶었던 건 따로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은 그에게 이상보다는 현실을 택하게 하는 족쇄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갑과 을의 관계를 이용하여 제자 김기쁨을 희생양 삼고, 오준구를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교수 직위에 임용시키려는 최기호 교수를 통해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갑의 지위에 있는 노교수의 거친 욕망은 을에 위치한 이들로 하여금 결국 그들 스스로의 싸움으로 비화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가족이라는 굴레로 인해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고 최기호의 결정을 따르게 된 오준구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결국 폭주하고 만다. 오로지 가족을 위해 발버둥치는 그의 과장된 모습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너무 안쓰럽게 다가온다.


 

감독은 영화를 개봉하면서 사회적인 부조리에 분노하면서도, 결국 비극을 담고 있는 희극적인 상황극 속에서 잠시나마 삶의 위안을 얻길 바란다고 말한 바 있다.

 

영화 <반도에 살어리랏다>는 오준구라는 한 개인의 욕망을 풍자하고 있으나 그 이면에는 우리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함이 응축돼있는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아울러 오준구라는 이웃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만만한 캐릭터를 앞세워 극의 몰입도를 높이고 있다. 코믹하면서도 씁쓸하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감독  이용선  


* 이미지 출처 : 씨앗, 독립애니메이션 배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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