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 '말모이'

새 날 2019. 1. 10.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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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국신민화정책의 일환으로 한글 사용이 엄격이 금지되고 이름마저도 일본식으로 바꿔야하는 창씨개명이 진행되던 서슬 퍼런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는 주시경 선생의 뜻을 이어받아 한글대사전 편찬을 위해 전국의 방언을 수집, 이를 표준화하는 말모이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소매치기를 일삼으며 수차례 옥살이를 경험한 김판수(유해진)는 근무 중이던 극장에서 해고당한 상태, 중학생 아들의 월사금 마련을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해야만 하는 처지였던 그는 과거 옥살이를 하며 낯을 익혔던 조선어학회의 큰 어르신 조갑윤(김홍파) 선생과 우연한 기회에 연이 닿으면서 학회의 잔심부름 등을 담당하는 인력으로 채용된다.

한편 학회 회장인 류정환(윤계상)은 매사 껄렁껄렁한 태도에 불성실하기까지 한 김판수가 영 탐탁지 않게 다가왔으나 그를 향한 회원들의 일방적인 두둔으로 인해 울며 겨자 먹기로 그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간극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사사건건 충돌을 일으키며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만 간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영화는 우리말을 말살하고 어떻게든 조선을 제국주의의 희생양으로 삼으려한 일제강점기, 그 엄혹하던 시절 우리만의 혼과 정신이 깃든 한글을 보살피고 살리기 위해 탄압과 모진 고초를 이겨내고 한사코 긴 어둠을 뚜벅뚜벅 헤치며 나아갔던 조선어학회 회원과 당시 그들을 물밑에서 그림자처럼 도왔던 민초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린 작품이다. 엄유나 감독이 외국인기자와 택시기사의 시선을 통해 우리를 지금에 있게 한 5.18민주화운동이라는 현대사를 그려낸 ‘택시운전사’에 이어 또 다시 근대사에 천착,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적 사실들을 잔잔하지만 가슴 뭉클한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



극의 초반은 조선어학회 회장 류정환과 김판수의 깊은 갈등 구조로 그려져 있다. 얼마 후 일제의 탄압이 더욱 극심해지고 우연한 기회에 두 사람의 갈등 또한 눈 녹듯 녹아내리면서 김판수의 본격적인 활약상이 그려진다. 그러고 보니 류정환과 김판수를 각기 연기한 두 배우 윤계상과 유해진의 브로맨스는 왠지 낯설지 않은 느낌이다. 손아름 작가가 쓴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 ‘소수의견’에서도 두 사람이 선후배 변호사로 나와 열연을 펼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당시의 기억이 흔적으로 남아 나름의 긴 호흡과 흐름이 끊기지 않은 채 그 명맥을 이어가게 했던 모양이다.



김판수와 그를 둘러싼 보통사람들의 적극적인 도움이 어려움에 처한 조선어학회를 정성껏 보듬으면서 극은 점차 절정으로 치닫는다. 우리가 지금 숨을 쉬고 물을 마시듯 일상 속에서 아무런 의식 없이 사용하는 한글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지식인들뿐 아니라 우리처럼 평범하기 짝이 없는 민초들의 지난한 노력과 희생이 근간이 되고 있음을 이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각인시키게 한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훨씬 위대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극중 조선어학회의 회원인 지식인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류정환 회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판수를 끝까지 감싸 안았던 학회의 어른 조갑윤(김홍파) 선생, 술과 낭만을 좋아하지만, 불의 앞에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너무나 인간적인 시인 임동익(우현), 기자로서 매의 눈으로 끝까지 원칙을 고수하려 노력한 박훈(김태훈), 조선어학회의 비밀 지하 서고와 책방의 운영을 도맡았던 여성 동지 구자영(김선영),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아내를 누구보다 사랑했지만 끝내 울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던 막내 민우철(민진웅), 혼을 이어가고자 했던 이들의 지난한 노력과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마도 지금과 같은 글과 말을 갖지 못했을 공산이 크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의 헌신 뒤로는 김판수처럼 이름 없는 수많은 민초들의 활약상이 자리하고 있으며, 영화 역시 이들의 희생을 결코 놓치지 않고 끝까지 조망한다.



유해진의 명품 연기는 작품을 더해갈수록 빛을 발하는 느낌이다. 사소한 신부터 굵직한 신까지 무엇 하나 나무랄 데 없이 그만의 끼를 오롯이 쏟아 붓는다. 가히 유해진의, 유해진에 의한, 유해진을 위한 영화라고 해도 될 만큼 그의 활약상은 두드러진다. 역사적 사실을 근간으로 하고 있고, 여기에 영화적 상상력이 더해지다 보면 간혹 신파 등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데, 이 작품은 그러한 요소를 최대한 배제시킨 덕분에 무척 담백하게 다가온다.



최근 젊은 계층을 중심으로 유희처럼 우리말과 한글을 파괴하는 현상이 공공연하게 빚어지고 있다. 심각할 정도로 말이다. 이 영화는 그들이 반드시 봐야 하는 작품이다. 뿐만 아니다. 숨을 쉬듯 매사 한글과 우리말을 사용하면서도 이의 고마움을 알 리 없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가 필히 관람해야 하는 영화다.



감독  엄유나


* 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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