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진지하지만 결코 진지하지 않게 '그린 북'

새 날 2019. 1. 5.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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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는 나이트클럽에서 흔히 ‘기도’라고 불리는 잡일과 함께 사람들로 인해 발생할 법한 시끄러운 일의 뒷정리를 맡은 인물이다. 클럽이 내부수리 등의 이유로 휴관에 들어간 어느 날, 지인이 알선해준 운전기사 모집에 지원하게 된 토니, 피아니스트이자 박사이기도 한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와의 인연은 이렇게 맺어졌다. 셜리는 8주 동안 미국 남부 지역을 순회하며 음악 연주회에 참석해야 했고, 토니가 그의 발이 되어줌과 동시에 매니저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언뜻 봐도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은 우여곡절 끝에 장도에 오르게 되는데...


토니는 이탈리아계 미국인으로 뭐든 자기 멋대로다. 성에 차지 않으면 주먹부터 나가는 다혈질에, 입담도 거칠기 짝이 없다. 허풍은 또 어떤가. 별명이 '떠버리'일 정도로 타인을 말로 현혹시키는데는 귀재다. 물론 이 떠버리 기질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가까운 훗날 아주 요긴하게 쓰이기 때문이다. 흑인을 벌레처럼 취급할 만큼 인종에 얽힌 편견에 있어서도 보통사람들보다 유독 심한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아내 돌로레스(린다 카델리니)는 그러한 남편을 조용히, 그리고 성심성의껏 내조한다.



반면 셜리는 학식이 높고 교양을 갖춘, 이른바 배운 사람으로서 단언컨대 품격이 폭력에 비해 우위에 있다고 믿는 흑인이다. 평소 벌레보다 못한 사람으로 취급하던 흑인 밑에서, 더구나 살아가는 방식이 물과 기름처럼 완전히 이질적인 사람과 함께 8주 동안의 여행길에 오르게 된 토니, 주변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가 1주일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조마조마하기 짝이 없는 두 사람의 여행, 과연 온전하게 이뤄질까?



영화는 누가 봐도 어울릴 법하지 않은 토니와 셜리 두 사람이 음악회 연주를 위한 미국 남부 지역 순회길에 오르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은 허구이지만 오프닝을 통해 실화에서 영감을 얻었음을 밝히고 있다. 즉, 하늘이 내린 뮤지션이라는 극찬을 얻은 실존했던 인물 피아니스트 돈 셜리와 그의 운전기사이자 매니저를 담당한 토니 발레롱가 두 남자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시간적 배경은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편견은 견고하다. 특히 피부색과 관련해서는 더욱 그렇다. 게다가 반 세기 훨씬 이전이라 지금보다 강도는 훨씬 심했을 것으로 짐작되게 한다. 영화 제목도 그와 관련이 있다. 여기서의 '그린 북'이란 유색인종이 마음놓고 묵을 수 있는 숙박업소를 안내해놓은 책자를 일컫는다. 음악회가 개최되는 지역으로 이동할 때마다 유색인종인 셜리가 안전하게 숙소에 묵을 수 있도록 운전기사인 토니를 통해 이를 활용하게끔 배려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 피부색이라는 지독한 편견을 이겨낸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히든 피겨스'에는 버스 등 대중교통을 탈 때도 흑인들은 뒷자리에만 앉아야 했고, 백인과는 화장실을 함께 이용할 수 없었으며, 단지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만으로 혐의가 없음에도 경찰의 차별 행위가 빚어지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린 북'인들 다를 리 없다. 특히 북부보다 남부에서의 차별 행위는 극심했다. 심지어 야간이 되면 유색인종은 아예 길을 나설 수 없는 통행금지령이 시행되는 곳도 있었다.



그러나 피부색과 관련한 편견은 잘못된 것이니 이를 바꿔야 한다는 메시지 따위는 영화 '그린 북' 내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에피소드를 통해 관객들이 직접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주인공인 토니와 셜리가 조금씩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면서 마음의 문이 열리고 변화해가는 모습을 스크린 위에 비춤으로써 관객들의 감정과 인식에도 미묘한 파장을 일으키게 할 뿐이다. 이 영화의 매력은 진지함을 결코 진지하지 않게 풀어낸, 바로 이 대목에 있다.


셜리는 워낙 많은 차별 속에서 살아온 터라 사실 작금의 대우에 대해 대체로 무덤덤한 편이다. 오히려 운전기사인 토니의 태도가 더욱 그를 거슬리게 한다. 앞서도 언급했듯 토니는 유독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이 심한 인물이라 말끝마다 셜리를 향해 '그쪽 사람들'이라는 표현으로 아예 선을 긋곤 한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 왠지 묘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최근 XX콜라인가 하는 개인방송을 오픈한 모 정치인이 말끝마다 '그쪽 사람들'이라며 편 가르기 하던 그 모습이 연상되는 것이다.) 토니는 셜리에게 고용된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당사자는 결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 눈치였다. 애초 너희들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인식이 머릿속에 콕 박혀 있기 때문이었을까?



토니가 셜리, 아니 유색인종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평소 같았으면 각기 숙소를 이용해야 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이 같은 숙소에서 함께 머무르게 되었을 때의 일화를 통해 확인 가능하다. 두 사람이 같이 있다가 토니가 외출하려던 순간, 문득 탁자 위에 놓인 자신의 지갑을 슬쩍 주머니에 넣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된다. 흑인은 모두 도둑놈이니 조심해야 한다는 편견이 이러한 행위를 자연스럽게 유발한 것이리라. 이는 유색인종에 대한 토니의 평소 편견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헤아리게 하는 장면이다.



고용인과 피고용인이라는 계약에 따르는 지위의 차이도 엄연히 존재했지만, 그보다는 백인과 유색인종이라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일 수 없는 이질적인 차이는 두 사람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어정쩡한 간극을 유지하게끔 하는 원동력이 되게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허나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을 겪으며 도움을 주거니 받거니 하게 되면서 절대로 서로에게 스며들 수 없을 것 같았던 두 사람 사이의 감정과 인식에도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남부 지역의 도로를 지나던 도중 차량 고장으로 멈춰선 토니, 연기가 풀풀 나는 엔진룸을 열고 이를 식히고 있는데, 차안에 있던 셜리의 눈앞에 보이는 뜨악한 광경, 그것은 바로 일군의 흑인들이 농장에서 힘겹게 땅을 일구는 모습이었다. 그들과 눈이 마주친 셜리, 순간 많은 감정이 교차한다. 자신은 천재성을 인정 받고 노력이 더해져 최고의 뮤지션이라는 호칭과 함께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정작 주류사회에서는 여전히 찬밥 신세에 검둥이 취급을 받고 있는 처지였고, 그렇다고 하여 같은 피부색을 지닌 이들 사이에서는 또 전혀 다른 부류로 취급 받고 있으니 셜리는 어느 계층에도 제대로 낄 수 없는 외로운 처지였다.



토니의 그 꼴통스러우며 우악스럽고 뻔뻔하기까지 한 연기를 천연덕스럽게 소화한 비고 모텐슨의 연기는 단연 최고다. 놀라울 정도로 섬세한 손놀림으로 피아노 건반 위를 오르락내리락 하며 우리의 청각세포까지 즐겁게 해주던 마허샬라 알리의 연기도 물론 엄지척 하고 싶다. 이 두 사람의 조합이 이번에 무언가 큰 일을 하나 만들어낼 것 같다. 이 영화는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감독상, 남우주연상 등 총 5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뿐만 아니다. 전미 비평가 위원회 시상식 작품상과 남우주연상, 할리우드 영화제 각본상 등 총 30개의 트로피를 거머쥐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로드 무비의 특징이란 바로 이런 데 있지 않은가 싶다. 함께 여행을 통해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면서 내면이 성장하고, 같이 있던 사람에게 조금씩 영향을 미쳐 어느 순간 전혀 다른 사람으로의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는 그런 류의 것 말이다. 비록 두 사람과 직접적으로 함께할 수는 없었으나 간접 경험을 통해 아주 유쾌하고 즐거우며 흥겨운, 그리고 뭉클한 감동까지 누릴 수 있었던 훌륭한 여행이었다. 2019년 첫 영화가 이토록 좋은 작품이었으니, 올해는 아무래도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조심스레 갖게 된다.


감독  피터 패럴리


* 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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