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ARS의 상투적인 기계음이 싫다

새 날 2018. 11. 12.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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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때문에 1588로 시작되는 모 기업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더니 대뜸 낯익은 기계음부터 들려온다. 이 기계는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 정보들을 사전 양해도 없이 주구장창 읽어대더니 한참 지나고 나서야 필요한 서비스를 선택케 하는 기회를 흡사 선심 쓰듯 제공해준다. 해당 번호를 입력했더니 또 다시 도움이 될 법하지 않은 잡다한 정보들을 기계음이 반복해서 읊어댄다. 아마도 해당 기업은 이조차 기업 홍보나 제품 마케팅 도구로 활용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마찬가지로 한참 지나고 나서야 또 다시 필요한 서비스를 선택케 하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상담 직원과 직접 연결되기까지 수 차례에 걸쳐 비슷한 단계를 밟아야 했다. 여기까지 오는 데 걸리는 시간 만해도 족히 1분은 더 소요된 듯싶다. 이 바쁜 세상에 해당 서비스를 이용하는 한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각기 빼앗은 1분은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일 테다. 그나마 상담 직원과 연결이라도 되면 다행일 듯싶다. 어떤 경우에는 무한루프 속에서 허우적거린 끝에 결국 상담 직원과의 통화에 실패하는 사례도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를 어이없게 하는 건 대부분의 사기업 공기업 등이 가리지 않고 활용하고 있는 1588 등으로 시작되는 이 대표번호 시스템의 통화요금이 발신자 부담이라는 사실이다. 


분당 118.8원을 지불해야 한단다. 가뜩이나 통화 대기시간도 긴 데다가 끝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전화를 끊어야 하는 사례가 속출하거늘 결코 저렴하지 않은 통신비마저 소비자가 지불해야 한다는 건 상당히 불합리하게 다가온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김경진 의원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2015년부터 2017년까지 이통3사의 대표번호 통화량은 대략 154억 분에 이른다. 



1분 통화요금 118.8원으로 단순 계산하더라도 1조8000억 원의 통신요금을 소비자가 모두 지불한 셈이 된다. 통신사와 휴대폰 제조사들의 과도한 비용 떠넘기기로 인해 무제한 요금제 등 통신 과소비가 일상이 된 탓에 체감상 별것 아니라고 여겨질지 모르지만, 소비자가 제품의 하자 등으로 기업에 전화하는데 통화요금까지 지불해야 하는 건 사실상 매우 부당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어쨌거나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사람의 목소리, 그리고 사람의 체온이 그리운 시대이다. 감정 하나 없이 늘 앵무새처럼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ARS의 무덤덤한 기계음은 차갑도 못해 짜증을 유발해온다. 이 상투적인 기계음이 난 싫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근래 많은 회사들이 고객센터를 이렇듯 ARS 자동응답시스템으로 해놓은 경우가 많다. 덕분에 회사측과 반드시 통화를 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조차 이 지긋지긋한 ARS의 자동응답만 반복해서 듣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반드시 사람과 사람이 접촉하여 해결해야 하는 사안마저도 비용이 저렴하다는 이유로 일단 기계가 접촉을 도맡는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전화 서비스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은행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 만해도 공격적으로 늘려가던 점포 수를 줄여 나가기 시작했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대면서비스의 필요성이 급격히 줄어들자 비용 절감과 효율화라는 기업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너 나 할 것 없이 줄지어 점포 줄이기에 나선 덕분이다. 대면서비스에는 인건비가 수반된다. 뿐만 아니다. 해당 조직을 운영하기 위한 물리적인 기반도 반드시 필요하다. 한 마디로 모든 게 비용이다. 


기계가 대행하는 비대면서비스는 이렇듯 막대하게 소요되는 비용 절감에 적잖은 도움이 된다. 기업이 벌이는 일 모두가 사실은 사람이 하는 일이건만 덕분에 사람과 기업 사이는 어느덧 기계로 가로막히고 말았다. 물론 이 또한 과도기적 현상일 가능성이 높다. AI가 본격 도입될 경우 지금처럼 단순 비대면서비스가 아닌 한층 지능적인 서비스로 대체될 개연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계가 지금보다 조금은 정교해지고 영리해질지는 몰라도 여전히 사람의 감정을 헤아리지는 못한다. 



김애란의 단편소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속 주인공 명지는 공허한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스마트폰의 음성인식서비스를 자주 이용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인공지능 한테 일부러 곤란한 질문을 던져보기도 하지만, 녀석은 의외로 똑똑했다. 최대한 예의를 갖춰 위기를 모면했다. 하지만 이처럼 기계에 의존하면 할수록 왠지 그녀의 공허함은 더욱 커져가기 만한다. 기계가 갖는 한계다. 제아무리 첨단장비를 갖춘다고 해도 따뜻한 감정을 지닌 사람을 상대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까운 미래, 사람의 직업 대부분을 기계가 대체하는 세상이 도래한다고 한다. 특히 단순 반복되는 직무의 경우 제일 먼저 희생양이 될 공산이 크다. 그러나 직업 대부분이 사라질 것이라는 끔찍한 전망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지금도 사람의 목소리 그리고 체온은 상당히 그립다. 기계가 대세인 세상에서는 더더욱 그리워질 것이다. 결국 사람의 감정을 헤아리고 이를 다루는 영역의 직무라면 오히려 지금보다 더욱 각광을 받는 직업군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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