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강서구 PC방 살인사건에 분노하셨다고요?

새 날 2018. 10. 22.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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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서구에 위치한 PC방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던 한 청년이 잔혹하게 살해되어 전 국민을 공분케 했다. 여론 덕분인지 해당 피의자의 신상정보가 22일 전격 공개됐다. 피의자에 대한 더욱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며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관련 청원글은 22일 오전 현재 80만을 훌쩍 넘으며 역대 최다 청원 기록을 갱신 중이기도 하다. 인기 연예인들까지 나서서 참여를 독려하고 있는 만큼 지금 같은 기세라면 100만 돌파는 시간 문제일 듯싶다.


그렇다면 이번 사건은 왜 이토록 대중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걸까? 피해자는 PC방을 찾은 피의자의 서비스 요구에 충실히 응했으나 괜한 트집을 잡아 시비를 걸었고, 결국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 정상적인 감정과 사고회로를 지닌 사람이라면 기껏해야 말다툼 수준에서 끝났을 법한 사안을 피의자는 살인 행위로 앙갚음한 것이다. 여기에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소견까지 덧붙였다. 대중들을 뿔이 나게 한 건 바로 이 지점이다. 심신미약을 핑계로 법정에서 감형을 받으려는 의도로 비쳤기 때문이다. 그동안 심신미약 범죄 행위에 대해 사법부가 관대한 처벌을 내려온 관행이 대중들로 하여금 이러한 우려를 낳게 한 것이다.


아울러 경찰의 당시 미온적인 대처도 도마 위에 올랐다. 최초 신고가 들어왔을 때 피의자 형제의 흥분을 충분히 가라앉히고 피해자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뜨려놓는 등 현장에서의 보다 적극적인 대처가 미흡했던 사실을 못내 아쉬워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언론에 공개된 CCTV상으로는 피의자가 범행에 나섰을 당시 동생이 피해자를 손으로 잡고 있는 듯한 모습이 비쳤음에도 이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점도 대중들로 하여금 신뢰를 저버리게 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더욱 큰 공분으로 이끈 보다 결정적인 사건은 그 뒤에 불거졌다. 숨진 피해자를 진료한 담당 의사가 당시 참혹했던 피해자의 상태를 인터넷에 상세히 공개하고, 각종 미디어 매체들은 이를 더욱 더 자극적인 형태로 가다듬고 가공하여 세상에 내보낸 것이다.


대중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 청와대 청원글의 청원 숫자가 이를 객관적으로 입증한다. 꽃다운 한 생명을 무참히 앗아간 피의자의 행위는 마땅히 성토되어야 하며, 그에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번 사건을 통해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번 사건은 어느 누가 보아도 자극적인 내용 일색이다.


사건의 단초도 어이없었던 데다가 그 범죄 수법 또한 너무도 잔인하여 공분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집단적 공분을 더욱 크게 확산시킨 건 다름 아닌 일종의 자극에 자극을 더한 콘텐츠였다. 자극적인 사건 내용에 더욱 자극적인 요소, 즉 담당 진료 의사의 무척 친절하면서도 상세한 환자의 상태와 이를 통해 유추해볼 수 있는 잔혹한 범죄 수법이 더해진 가운데 언론은 그들만의 자극적인 문법으로 생산된 콘텐츠를 퍼트리기 바빴으며, 대중들은 국민청원이나 SNS 등을 통해 이를 적극적으로 소비하고 나선 상황이다.


ⓒ경향신문


국민의 알 권리 측면이라며 다수의 대중들은 작금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이겠으나, 굳이 몰라도 될 내용들이 소비되면서 자극적인 상황을 더욱 확대재생산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 조금은 우려스럽다. 아무리 현실 공간에서 벌어진 사건이라고 해도 이를 지나치게 상세히, 그리고 자극적으로 묘사하는 건 바람직스럽지 못한 측면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의사는 한 사람의 직업인으로서, 그리고 소중한 생명을 다루는 한 사람의 의료인으로서 직업상의 윤리이자 의무를 마땅히 따라야 하는 까닭에 환자의 진료 상태를 외부에 함부로 발설해서는 안 된다. 해당 의사는 이러한 윤리의식을 저버린 채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웠다. 때문에 나는 국민의 알 권리라는 명분에 앞서 끔찍한 범행 방식까지 온 국민에게 꼼꼼하게 알린 한 의사의 행위에 결코 박수를 보낼 수가 없다.


이와 관련하여 윤현배 서울대 의대 교수가 지난 16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관련 글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최근에 있었던 끔찍한 PC방 사건의 피해자를 응급실에서 진료했던 남궁인 전문의가 당시 환자의 상태와 진료 내용에 대한 상세한 글을 어제 페북에 전체공개로 올렸으며, 하루 만에 수십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읽은 것으로 보인다. (...) 당연히 환자의 동의는 구하지 못했을 것이며, 유가족의 동의를 구했다는 언급도 어디에도 없다. 정보공개의 공익적인 목적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명백한 의료윤리와 의무의 위반이다”



자, 어떤 생각이 드는가? 이번 사건을 접하면서 말도 안되는 상황을 연출한 피의자의 행위에 대해 우리는 충분히 분노하고 또 분노했다. 신상까지 까발리면서 말이다. 그러나 잔혹했던 그의 범죄행위에 대해 이를 굳이 구체적이고도 상세히 알 필요까지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사건의 개략적인 윤곽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공분할 수 있었으며, 자극적인 콘텐츠의 생산보다는 비슷한 사건이 재발되지 않도록 사회에 경각심을 일깨워야 한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자극적인 콘텐츠들이 만연하고 있는 세상이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이러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해당 의사가 당시 어떠한 소명의식과 사명감을 갖고 벌인 행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의료윤리를 저버린 채 진료 과정에서 느꼈을 법한 지극히 사사로운 감정이나 자극적인 사안을 공개함으로써 전 국민이 굳이 알 필요가 없었던 콘텐츠까지 노출시킨 건, 알 권리를 통해 얻는 이득보다 도리어 부작용이 더 크게 다가오게 하는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이번 사건을 접하면서 무조건적인 분노에 앞서 곰곰이 되짚어봐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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