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규격을 벗어난 삶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새 날 2018. 8. 2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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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는 엄혹했다. 무고한 광주시민들을 무력으로 처참히 짓밟고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군사정권의 서슬퍼런 압제가 정점에 달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당시 대학가의 학생들은 학생회와 동아리 등을 중심으로 이른바 불온서적이라 불리는 책을 서로 몰래 돌려 읽으면서 감춰진 진실에 대한 갈증을 일부나마 해소하곤 했다. 책 한 권이 지닌 힘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진실에 비로소 눈을 뜨고 이에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선 학생들은 치솟는 분노에 어쩔 줄 몰라해했다. 불의에 맞서기 위해 과감히 거리로 뛰쳐나왔으며, 이들의 피끓는 에너지가 한데 모여 결국 오늘날 민주화의 발판을 마련하는 결정적인 원동력으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최루탄 가스로 뒤덮여 온통 희뿌옇던, 숨조차 마음대로 쉴 수 없게 했던 불온한 대기, 그리고 순진하기 짝이 없던 수줍은 청년의 한 손에 들려진 책, 또 다른 손에 들려진 묵직한 돌..


서울대학교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석사 학위를 취득,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도중 칼 마르크스의 역작 '자본론'을 접한 뒤 문화적 충격을 받아 회사에 돌연 사표를 던지고, 모 진보정당의 당원이 되어 활발히 활동하면서 사회과학 서적 작가의 길로 들어선 임승수 씨의 이야기는 앞서 언급한 80년대를 관통하던 당시 청년들의 모습을 상당 부분 빼닮았다. 책 한 권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더니 온전히 그에 걸맞은 사례로 판단된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 즉 프레임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 고민케 하고,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 숨어 있는 착취의 원리와 시간의 비밀을 파헤치며, 돈보다는 시간의 가치가 월등히 크다는 사실을 자신의 생생한 경험과 체험을 통해 말하고 있다. '생계형 마르크스주의자의 유쾌한 자본주의 생존기'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비록 자본론 이론의 핵심이 언급돼 있는 등 다소 딱딱한 소재를 다루고 있기는 하나 어느 누가 읽어도 술술 읽힐 만큼 쉽게 써내려간 내용 그리고 가볍고 유쾌한 필치는 읽는 이의 부담감을 줄이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그는 스스로를 자본주의 사회의 규격외품종이라 자처한다. 그렇다면 이와 상반된 개념의 규격품종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사람들이 말하는 보편적인 삶, 즉 학교를 졸업, 안정된 기업체에 입사하여 회사에 충성하면서 정년까지 버텨내는, 이른바 철저한 회사인간으로서의 삶을 일컫는다. 회사에서 중도 퇴직함으로써 보편적인 삶으로부터 일찌감치 그리고 멀찍이 이탈한 그는 이 때문인지 책 제목에서 자신을 불량품이라 지칭하고 있다. 이 불량품이란 바로 규격외품종과 동일한 의미의 쓰임새다.



결국 규격외품종 내지 불량품이란 소위 잘 나가는 직장을 하루아침에 때려치운 뒤 80년대에나 관심을 끌었을 법한, 지금은 아무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 사회과학 서적 작가라는 불안한 삶을 선택한 그의 딴짓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솔직한 속내이자 오지랖에 가깝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오지랖에 대해 그는 비교적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며 그만의 살아가는 방식의 일단을 내비치고 있다. 무엇보다 시간을 주체적으로 통제 가능하다는 이점이 그의 불량품 같은 삶을 행복에 이르게 한단다. 보편적인 삶, 즉 양품의 삶이란 사실 많은 시간을 회사에 할애해야 하기에 적어도 시간에 관한 한 주도권이 자신에게 주어질 리 만무하다.


하지만 보편에서 이탈한 비주류의 삶은 어디를 가나 고달프다. 학교에서는 왕따를 당하기 일쑤이고, 회사에서는 직따를 당하곤 한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으려는 노력은 그래서 때로는 아주 눈물겹다. 요즘 청소년들의 복장은 한결 같다. 위 아래 검은색 의상으로 통일, 마치 유니폼을 입은 듯싶다. 아웃사이더로 낙인 찍히지 않으려는 그들의 이러한 몸짓은 이 책의 저자가 언급한 불량품이 되고 싶지 않노라는 속내를 내비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행이라는 어쭙잖은 형식에 스스로를 가두면서 우리 사회를 몰개성 사회로 만들어가는 게 아닌가 싶어 어딘가 모르게 씁쓸하다.



물론 저자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님은 분명하다. 하지만 기왕지사 불량품의 삶을 선택하고 결정한 이상 나는 그가 조금 더 떳떳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야 불량품이 되기를 원하는 무수한 또 다른 이들에게 희망으로 다가올 테니 말이다. 게다가 나 역시 저자와 같은 획일화되거나 규격화된, 이른바 양품이 아닌, 각자가 꿈꾸며 살아가고픈 방식에 도전하는 삶을 응원하는 입장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글로부터는 주변 사람들을 지나치게 의식, 남들과 비교하거나 자신을 낮잡아 표현하는 바람에, 특히 돈보다 시간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적은 소득을 자꾸만 언급하는 바람에 어딘가 모르게 불편함이 느껴지고,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게 한다. 돈에 대해 집착하는 것을 보니 제대로 된 불량품이 되려면 아직은 멀은 듯싶다.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하지만 '행복'과 '불량'이라는 두 단어가 갖는 이질감 그대로 무언가 삐걱거리는 느낌이다.


아울러 마치 드라마 등에서 보게 되는 PPL처럼 과거 저자가 집필했던 도서를 자주 언급하고 홍보한 점 역시 옥에 티다. 유쾌한 생존기라고 말하고 있지만, 결코 유쾌하지 못하다. 이렇듯 몇가지 측면에서 책 내용이 다소 미흡하고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나는 저자가 언급하는 형태의 불량품이 우리 사회에 보다 많이 양산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저자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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