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비울수록 사람을 더 채우는 말 그릇

새 날 2018. 8. 18.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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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바로 앞에 피씨방이 새로 오픈했다. 200석에 달하는 거대 규모다. 코인 노래방도 함께 운영하는 형태로 보아 아이들을 타깃으로 한 것임이 분명했다. 우려스러웠다. 무리 지어 다니기 좋아하는 아이들이 골목 안쪽까지 밀려 들어와 조용하던 주택가를 혼돈의 아비규환으로 몰아넣을 게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 우려는 현실이 됐다. 적게는 대여섯 명에서 많게는 십여 명의 아이들이 우루루 몰려다니면서 담배를 피우고 시도 때도 없이 떠들어댔다.


이제 갓 중학생이 된 듯한 앳된 아이들이 입에 담배를 문 채 거리낌 없이 골목을 누비는 모습은 내겐 무척 생경했다. 흡연 청소년이 아무리 많이 늘어났다 한들 적어도 자신들의 행위가 떳떳하지 못하다는 사실만큼은 아는듯 으슥한 골목에 숨어 피우던 녀석들이었건만, 어느새 주변 어른들의 시선쯤은 아무렇지도 않은 양 불 붙인 담배를 입에 버젓이 문 채 떳떳하게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수 년 사이의 변화 치고는 놀랍다.


이제 어른들은 담배 피우는 아이들을 보아도 제지하기는커녕 흘끔거리지도 않는다. 제 갈 길을 가기 바쁘다. 가정에서도 포기하고 학교에서도 연이어 포기한 훈육은 수많은 아이들의 인성을 무너뜨렸고, 이제 이는 어느 누구도 복원시킬 수 없게 돼버린 듯싶다.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담배 연기를 피해 가거나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손으로 연거푸 부채질만 해대는 일뿐이었다.



골목길을 지나가는 행인들이야 순간만 모면하면 그만일 테니 작금의 상황은 그다지 신경 쓰일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기 자식 건사하기도 힘든 세상인데 남의 자식 됨됨이까지 신경 쓸 겨를이 이들에겐 사실상 없다. 그러나 나의 입장은 그들과는 전혀 다르다. 아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일종의 아지트가 되는 셈이니 말이다. 이미 수 년 전 경험한 바다.


나의 집 주변으로 자꾸만 파고들어 주거 환경을 오염시키려는 그들을 가만히 놔두어선 안 될 것 같았다. 자신들의 권리 행사로 타인의 권리에 심대한 피해를 주게 된다면 이는 당연히 제지해야 한다. 중고등학생 무리로 보이는 아이들 대여섯 명이 집 바로 옆에 모여 떠들며 담배를 피우고 있길래 난 살포시 그들 앞에 섰다. 그러곤 점잖게 타일렀다. "얘들아, 미안한데 다른 곳으로 가 놀면 안 될까?" 그랬더니 한두 녀석이 "네"하고 대답한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표정들을 보아 하니 다들 떨떠름했다. 어라, 요것들 봐라.


나는 사실 아이들이 담배를 피우는 일에는 관여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이는 각 가정이나 학교에서 다뤄지고 책임져야 할 사안이기 때문이다. 대답만 하고 꿈쩍않던 아이들에게 나는 다시 "야, 너희들 다른 곳에 가 놀라고 했잖아" 라고 조금은 높은 톤으로 말했다. 그런데 순간 무언가 싸한 분위기가 나와 그들 사이를 갈랐다. 이번에는 아무런 대답도 않은 데다가 물러서지도 않고 있었다. 난 졸지에 꼰대가 된 건가?



조심스레 내뱉은 나의 첫 말을 무시한 아이들로 인해 감정이 상했고, 그 감정이 고스란히 두번째 말에 실려 아이들에게 전달됐던가 보다. 문득 '말 그릇'이라는 책의 내용이 떠올랐다. 코칭심리전문가인 김윤나 씨가 쓴 것으로, 세상에는 말을 잘 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존재하는데 이의 차이는 다름 아닌 말을 담을 수 있는 그릇, 즉 말 그릇의 크기에서 기인하며, 때문에 우리는 말을 잘하는 단순한 기술을 익히는데 노력하기보다 말을 담아내는 말 그릇의 크기를 키우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말에는 그 사람만의 감정이 오롯이 녹아들어 있다. 말을 꺼내기에 앞서 먼저 작동하는 게 감정이기 때문이다. 말은 감정을 그대로 따라간다. 때문에 말에서 발생하는 대개의 문제는 서툰 감정으로부터 비롯되는 경향이 크다. 특정 감정을 인지하고 이것이 발현될 수 있도록 길을 터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 즉 감정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경우, 감정을 잘 구별하지 못해 표현에 서투르게 되거나 심지어 다양한 감정들을 몇몇의 특정 감정으로 대체하여 표출되곤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감정에는 기쁨, 슬픔, 즐거움, 미안함, 괴로움, 언짢음, 사랑 등 다양한 종류가 있으나 감정에 서툴다 보면 이들의 결을 죄다 무시하고 온통 분노라는 감정에만 익숙해지기 십상이다. 단지 언짢았을 뿐인데, 때문에 언짢다는 감정을 표현하면 모든 게 끝날 상황인데, 이를 표현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 보니 이러한 감정조차 화를 내는 등 분노로 돌변하는 게 바로 비슷한 사례다. 유독 화병이 잦고 분노 조절에 힘겨워 하는 사람들이 근래 많은 건 평소 감정을 다루는 방법에 익숙지 못한 결과물인 듯싶다.



말이란 모름지기 한 사람의 인격이자 됨됨이다. 이 책에 따르면 말을 담아내는 그릇이 얕은 사람은 생각나는 대로, 아울러 말하고 싶은 대로 말을 쏟아내고, 반대로 그릇이 넓고 깊은 사람은 상황과 사람, 심지어 상황과 사람을 바라보는 자신의 입장까지 고려해서 말한다고 한다. 결국 넓고 깊으며 보다 단단한 말 그릇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우리의 감정을 잘 다루고 이를 체화시켜 태도로 발현시켜야 함을 의미한다.


아이들에게 대뜸 격한 발언을 쏟아낸 건 전적으로 나의 불찰이다. 감정 조절에 실패한 탓이다.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원래의 감정이 아닌 엉뚱한 감정이 말에 그대로 실려 아이들의 감정을 자극한 셈이 됐으니 말이다. 어쩌면 담배 피우는 아이들이라는 선입견이 내가 당시 느끼고 있던 특정 감정을 분노로 이끌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한 마디의 말은 상대방의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고, 이는 또 다른 양태로 다른 이들에게 전달되어 계속해서 생명을 이어가는 속성을 지닌다.


말은 곧 감정이고, 감정 다루는 기법을 익히지 못한 이들이 엉뚱한 감정을 실어 말로 발현시키는 까닭에 흔히 사달이 빚어지곤 한다. 결과적으로 말을 잘하기 위해서는, 물론 여기서는 단순히 기술적인 말 잘하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즉 한 사람의 됨됨이를 상징하는 말 그릇의 크기는, 자신의 감정을 얼마나 잘 조절하고 제대로 담아내어 표현하느냐에 달린 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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