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연쇄살인범에게 보내는 짓궂은 농담 '살인자의 기억법'

새 날 2018. 5. 15.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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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살에 첫 살인의 쾌감을 맛본 나는 마지막 살인을 무려 25년 전에 저지른 바 있다. 지금의 나이가 70세이니 대략 45세까지 살인을 저질러 온 셈이다. 내가 계속해서 살인 놀이에 빠질 수 있었던 건 무엇보다 완벽한 쾌감이 가능하리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죽일 때는 그 전의 경험보다 더욱 완벽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살인 따위는 않는다. 이렇게 된 건 바로 그 희망이란 두 글자가 내게서 문득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는 수의사 출신이다. 때문에 살인은 식은 죽 먹기다. 오로지 살인을 위해 끊임 없이 체력 단련도 해 온 몸이다. 특히 상체의 근력을 더욱 강하게 키워 왔다. 이쯤 되면 특급 살인 병기라 칭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마지막 살인을 저지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난 차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하고 만다. 머리를 크게 다쳐 두 차례의 수술을 받게 된다. 이 때부터 뇌세포의 특정 부위가 급격히 위축되어 갔다. 기억력이 사라지는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25년 전 희망이 사라졌다는 느낌을 받고 더 이상의 살인을 저지르지 않게 된 것 또한 이 교통사고와 전혀 무관치는 않으리라 짐작된다. 알츠하이머의 증상은 갈수록 심해져 바로 앞의 것을 기억 못 하는 경우가 일상이 되었으며, 메모나 녹음 없이는 정상적인 생활이 거의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내겐 딸 은희가 있다. 물론 혈육은 아니다. 내게 죽임을 당한 여자가 제발 딸만은 살려달라며 애원하였고, 어느 누구보다 약속을 잘 지키는 나였기에 은희를 거두어 내 딸로 키워 온 것이다. 


당시 내가 살던 동네에서는 연쇄 살인이 벌어지고 있었던 터라 분위기가 온통 흉흉했다. 그 와중에 우연히 박주태라는 남성과 마주하게 됐는데, 그의 수상한 행적과 살인자만이 느낄 수 있는 살기 등등한 분위기로 미뤄 짐작컨대 그는 작금의 연쇄 살인을 저질러 온 살인마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 즈음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28살이 된 딸이 어느 날 진지하게 사귀고 있다며 데리고 온 사내가 다름 아닌 박주태가 아닌가.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딸에게 그는 연쇄 살인마이니 절대로 사귀지 말 것이며 항상 몸 조심하라고 타일렀지만, 딸은 도대체 나의 말 따위는 들을 생각이 애초에 없었던 것인지 무시하기 일쑤였다. 오히려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25년 동안 잊고 지내온 그 피와 뼈를 향한 나만의 뜨거운 욕망을 감추지 않은 채 그에게 오롯이 쏟아내기로...  


여백이 많고 140여 쪽에 불과한 이 책은 그야 말로 순식간에 읽힌다. 기억을 상실해 가는 연쇄살인마라는 흥미진진한 소재와 유독 읽기 쉽게 써내려간 작가의 부드러운 필치는 쪽을 넘기는 손의 움직임을 더욱 바쁘게 만든다. 그러나 희대의 살인마 나 그리고 또 다른 연쇄살인마 박주태와의 극적인 충돌로 치달아가며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로 빠르게 전개되던 이야기는 거의 끝자락에 이르자 급정거를 시도한다. 



책을 끝까지 다 읽고 보니 무언가 허무하기 짝이 없다. 흡사 독자를 놀리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뒤끝이 영 개운치 못 하다. 내가 바라던 그 결말이 아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로 이야기가 끝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누구든 앞의 내용을 다시금 거들떠 보거나 복기하기 마련이다. 나 역시 책장을 앞으로 되돌려 뒤의 내용과 얼추 짜맞추어본다. 작가가 바랐던 건 무얼까? 독자들에게 과연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던 걸까? 


"혼돈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면 혼돈이 당신을 쳐다본다."


니체의 말이다. 이런 걸 원했던 걸까? 


반야심경도 언급됐다. 금강경 문구도 나온다. 심지어 그리스 신화며 몽테뉴까지 이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알듯 모를 듯 모호하기 짝이 없는 이들 문구가 곳곳에 등장하는 건 결국 뜻밖의 결말을 예고하려는 장치 아니었을까? 주인공 연쇄살인마가 시를 가르치던 강사에게 메타포가 무어냐고 묻던 바로 그 메타포란 결국 이런 것이었을까? 작가가 이 책을 통해 독자에게 말하고 싶었던 건 70세의 치매 걸린 연쇄살인마의 혼잣말을 통해 옮기고 싶었던 혹시 이 문장 아니었을까? 


"치매는 늙은 연쇄살인범에게 인생이 보내는 짓궂은 농담이다" 


속도감 있게 이야기가 전개되는 만큼 그 결말이 남기는 여운은 더욱 공허하면서도 씁쓸함을 지울 수 없게 한다. 이 소설은 얼마 전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다. 과연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게 될지 자못 궁금해진다. 



저자  김영하


펴낸 곳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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