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모든 이들의 삶은 반짝거린다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새 날 2018. 5. 14.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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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토 타케루)는 평소 대화를 나눌 때 "만약에.."라는 가정법을 즐겨 사용한다. 여자친구(미야자키 아오이)는 이런 나의 말버릇을 장난 삼아 놀리곤 한다. 나의 직업은 우편을 배달하는 일이다. 여느 때처럼 자전거를 타고 목적지로 향하던 어느 날 나는 급작스런 머리 통증으로 인해 자전거와 함께 쓰러지는 사고를 당하게 된다. 치료차 내원한 병원, 나의 진료를 담당한 의사는 말도 안 되는 끔찍한 진단을 내리고 있었다. 악성 뇌종양 때문에 앞으로 얼마 살지 못 할 것이며, 지금 당장 죽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상태가 아주 위중하단다. 



그러니까 시한부 삶이었다. 억장이 무너지는 느낌이란 게 바로 이런 걸까.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히는 데다 하필이면 왜 내게 이런 시련이 닥친 것인지 처음에는 분노를 느꼈지만, 이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좌절감으로 변하면서 수면 아래로 급속히 가라앉고 만다. 그러던 와중에 내 앞에 나와 똑같이 생긴 인물이 나타나더니 뜬금없는 제안을 해온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하나씩 없앨 때마다 나의 수명을 하루 연장 가능하게 해준다는 제법 솔깃한 제안이었다. 



내일 죽을 것이라는 정체 모를 끔찍한 굴레로부터 당장 빠져나오기 위해서라도 나는 그의 제안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제일 먼저 없애기로 한 물건은 전화기였다. 그의 제안은 거짓이 아니었다. 실제로 세상의 모든 전화기가 사라지고 만 것이다. 동시에 전화기와 얽혀 있던 추억과 관계들 또한 눈녹듯 사라져버리고 만다. 이렇게 나의 수명은 하루 연장되는데...   



가와무라 겐키의 동명 소설이 이 작품의 원작이다. 일본 내에서 연재를 시작하며 뜨거운 반향을 불러온 해당 소설은 우리나라와 중국, 대만 등에서도 발간되어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른 바 있다. 시한부 삶을 선고 받은 '나'가 생명 연장을 대가로 세상에 존재하는 특정 물건 그리고 그와 얽힌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현상을 몸소 경험하면서 삶이란 무엇이고, 곧 맞이하게 될 죽음은 또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묵묵히 깨닫는다는 내용의 작품이다. 



나의 심리 상태는 그야 말로 최악이다. 시한부 삶을 선고 받은 이후 그 충격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다. 그러니까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심경을 또 다른 내면속 나를 등장시킴으로써 묘사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영화 '몬스터 콜'에서 시한부 삶을 선고 받은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과 다른 한편으로는 작금의 고통으로부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몬스터 형상의 또 다른 자신으로 등장시켰던 내용과 판박이다. 



이렇듯 주변에 있던 누군가와 이별을 해야 하는 경우나 자기 자신이 세상과 영원히 작별을 고해야 하는 상황은 누구에게든 깊은 상실감 및 좌절감을 안겨주기 마련이다. 스크린 위로 펼쳐지는 시골 마을의 자연 풍광과 고풍스러운 건물들, 그리고 사람들을 포근히 감싸주는 거리 하며 낡은 소품들은 유독 정겹고 아름다운데, 그럴수록 곧 운명처럼 다가올 나의 죽음은 왠지 더욱 안타깝기 만하다. 



평소엔 그다지 크게 관심을 두지 않던 물건들이 막상 눈 앞에서 사라지자 그 물건의 물리적인 실체가 아쉽다기보다 그에 얽힌 눈에 보이지 않던 모든 소중한 것들, 이를테면 사람들, 장소, 추억, 관계 등등이 없어지는 사태가 나를 미증유의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다. 하물며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물건 하나만 사라져도 세상은 이렇게 달라지건만, 만약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아버지(오쿠다 에이지)는 내가 태어났을 때 "이 세상에 태어나 주어 정말 고마워" 라고 말했다.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엄마(하라다 미에코) 역시 "네가 태어난 이후 내 인생이 얼마나 멋지게 빛났는지 넌 모를 거야" 라고 말했다. 부모님의 이러한 말씀, 그리고 영화광 친구인 츠타야(하마다 가쿠)가 나의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추천하고 싶은 영화를 고르고 고르다가 어떤 작품을 골라야 할지 몰라 당황해 하고 곤혹스러워 하는 진솔한 모습 속에서 그와 관련한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세상에서 내가 사라진다면 누가 슬퍼해줄까요? 



감독  나가이 아키라


* 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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