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카타르시스로 다가오는 한 마디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새 날 2018. 5. 10.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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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절벽의 시대다. 번듯한 회사에 정직원으로 들어가기란 하늘의 별따기 수준이다. 아오야마(쿠도 아스카)는 취업을 하지 못 할까 봐 상당히 조바심을 느끼고 있는 터였으나, 용케 취업에 성공하게 된다. 하지만 어렵사리 뚫은 관문을 통과하자마자 또 다른 혹독한 시련이 아오야마의 인내심을 테스트해 온다. 조직의 분위기는 그야 말로 살벌했다. 10분만 지각하더라도 벌금을 내야 했으며, 유급휴가 따위는 아예 꿈조차 꿀 수 없는 형편이다. 


20세기로 돌아가기라도 한 양 출근하자마자 전 직원이 사무실에 모여 일제히 체조를 하는 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다. 어릴 적 학교 조회 시간에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국민제조를 시키던 장면을 오버랩시킨다. 아울러 조직원들을 진두지휘하는 부서장의 성품은 호랑이 선생님 저리 가라다. 덕분에 입사한 지 수 개월차로 접어든 아오야마에게는 회사 내에서의 모든 일들이 여전히 어렵기 만하다. 



일단 취업을 하지 않으면 루저로 전락할 것 같은 조바심 때문에 영업 직무를 선택하여 취업에 성공하긴 했으나, 적어도 그에게 만큼은 자신의 몸에 맞지 않은 옷을 걸친 꼴과 진배없었다. 실적을 독촉하는 부장의 목소리는 저승사자의 그것이었으며,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조직의 분위기는 그로 하여금 절로 숨이 턱턱 막히게 했다. 항상 위축되어 있기 일쑤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적응하기 위해 그가 택한 방식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학대하는 일이었다. 



계속되는 야근에 하루의 경계가 점차 흐릿해지고, 살기 위해 일을 하는 건지 일을 하기 위해 살고 있는 건지 도무지 헷갈릴 정도로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빠져들기 시작한다. 이러한 나날의 연속, 그러던 어느 날 전철을 기다리던 도중 열차가 들어섬과 동시에 몸이 철로로 스르르 빨려들던 아오야마를 의문의 한 청년이 확 잡아끌어 목숨을 구한다. 청년의 이름은 야마모토(후쿠시 소우타)였다. 그는 자신을 아오야마의 초등학교 동창이라고 소개했다. 우연히 야마모토와 인연을 맺게 된 아오야마는 그로부터 직장 생활 전반에 대한 조언을 듣고 변화를 꾀하기 시작하는데... 



사회 초년생인 아오야마는 매일 야근에 시달려야 하는 처지였다. 일한 만큼 정당하게 권리를 보장 받을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겠으나 그가 몸 담고 있는 직장의 조직 문화는 전혀 그러한 분위기가 못 됐다. 그나마 그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즐거움은 주말의 한가로움이었다. 평일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 오롯이 할애하고, 주말이 되면 집에서 녹초가 돼버리는 게 그의 일상이었다. 평균 노동시간 OECD 2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는 우리의 '월화수목금금금'의 현실보다는 그래도 나은 편이니 그에게는 위안으로 다가오는 대목 아닐까? 


이 영화의 원작은 기타가와 에미의 데뷔 소설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다. 해당 소설은 일본에서만 35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다. 덕분에 제21회 전격소설대상 ‘미디어웍스문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 묘사된 직장의 모습은 다소 과장됐다 싶을 만큼 우스꽝스럽고 끔찍하다. 물론 현실은 영화에서처럼 직접적이거나 거친 방식보다는 훨씬 교묘하면서도 은밀한 그것이 동원됐으리라 짐작되게 한다. 


결론적으로는 조직원들을 압박하여 번아웃으로 몰고가는 직장내 문화는 영화나 현실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다. 죽음의 문턱에서 아오야마를 구한 야마모토는 어딘가 비밀스러운 구석이 있는 청년이었으나 살갑게 다가오는 성격인 데다가 아오야마에게는 도우미 역할을 톡톡히 하는 덕분에 두 사람은 오래된 절친처럼 금방 친숙해진다. 야마모토는 여러모로 아오야마에겐 은인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적어도 영화 속에서의 일본 내 직장은 아오야마의 상사인 부장처럼 위계에 의해 부여된 권위를 남용, 위압적으로 부하 직원들을 다루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고, 실적 경쟁을 부추겨 함께 일하는 직원을 동료가 아닌 전쟁터의 적군으로 만들기 일쑤이며, 직원들의 온당한 권리마저도 보장해주지 않는 조직 문화가 여전히 팽배해 있는 것으로 읽힌다. 



직장 내에서의 괴롭힘과 왕따가 횡행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업 절벽이라는 끔찍한 구조적 환경 속에서 이 곳을 벗어나게 될 경우 자신들을 받아줄 곳이 없다는 현실에 좌절을 느끼는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무한경쟁 사회에서의 패배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눈물을 머금고 오늘도 그 힘든 출근길을 재촉한다. 그러다가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으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례도 왕왕 있다. 



우리처럼 직장에 다니면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평범한 소시민 아오야마의 끔찍한 조직 생활의 모습, 그리고 그로 인해 번민에 싸인 그를 곁에서 늘 지켜보면서 말벗이 되어주거나 때로는 힘을 북돋워주는 역할을 자임하며 삶의 스펙트럼은 생각보다 넓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야마모토 사이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통해 우리의 일과 삶 전반을 돌아보게 하는 멋진 작품이다. 



대한민국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들 다수의 여건 또한 이 영화속 주인공과 별반 다르지 않다. 때문에 하루에도 수 차례 사직서를 제출하는 상상의 나래를 펴곤 한다. 우리 마음 속에는 늘 사직서가 보관돼 있으며, 실재 사직서를 품고 다니는 이들도 더러 있다. 하지만 여건상 이를 제출할 용기는 쥐꼬리만큼도 없는 게 보다 솔직한 속내일지도 모른다. 되레 퇴직하라는 말이 나올까 봐 늘 노심초사해 하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비록 영화 속이지만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라고 외치며 홀가분함에 자신도 모르게 가방을 휘두르면서 폴짝폴짝 뛰는 아오야마로부터 우리는 상당한 수준의 카타르시스를 얻게 된다.



감독  나루시마 이즈루


* 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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