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청년세대를 향한 우울한 메타포 '버닝'

새 날 2018. 5. 21.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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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를 꿈꾸며 알바를 전전하던 청년 이종수(유아인), 어느 날 알바 도중 어릴 적 한 동네에서 살던 신해미(전종서)를 우연히 만나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 그녀는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부재 중 자신의 집에서 키우던 고양이 밥을 부탁하였고, 종수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인다. 고양이 밥을 주기 위해 꾸준히 그녀의 집에 드나들던 종수, 얼마 지나지 않아 해미로부터 귀국한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달 받는다. 



하지만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며 한달음에 마중 나간 공항에는 그녀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프리카 공항 체류 중 연이 닿았다는 벤(스티브 연)이라 불리는 사내와 함께였다. 자신과는 전혀 다른 부류로 짐작되는 벤이 종수에게 탐탁지 않게 다가왔던 건 다른 무엇보다 해미 때문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녀의 매력에 빠져들었는데, 난 데 없는 훼방꾼이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그는 재산도 많은 것 같았고, 지적인 데다가 유머 감각마저 뛰어나 보였다. 해미의 몸과 마음이 벤 쪽으로 자꾸만 기울어가는 게 분명했다. 이후로 해미와 종수 단 둘의 만남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녀의 연락을 받고 나가면 어김 없이 해미의 곁엔 벤이 함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해미로부터 벤과 함께 종수의 파주 집으로 향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게 되는데...   



이 작품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 '헛간을 태우다'가 원작이며, 또한 하루키의 소설은 윌리엄 포크너의 단편 소설 '헛간 방화'가 모티브라고 한다. 이 영화는 제71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어 평단의 찬사가 이어졌다. 유력 영화지인 스크린데일리가 집계한 평점에서도 역대 최고점을 받았다. 그 어느 때보다 본상 수상을 기대케 하던 바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전혀 달랐다. 국제영화 비평가 연맹상과 기술부문 최고상에 해당하는 벌칸상을 수상했지만 아쉽게도 본상 수상에는 실패한 것이다. 


영화는 가까운 미래에 작가가 되는 게 꿈이지만 일정한 직업 없이 알바를 전전하며 불안한 미래를 살아가는 청년 종수와 행사 알바를 통해 모은 돈으로 해외 여행을 즐기면서 카드 빚에 허덕이고 있는 현실을 애써 잊고자 하는 해미, 그리고 젊은 나이에 엄청난 부를 누리며 말끔한 외모와 성격을 갖추고 있지만 어딘가 모르게 비밀스러운 데다가 정신적으로 결핍이 있는 듯한 벤 이 세 사람 사이의 관계와 미스터리한 에피소드를 통해 오늘날 청년들의 불안과 분노를 이야기한다. 



이창동 감독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지금 젊은이들은 자기 부모 세대보다 더 못살고 힘든 최초의 세대다. 지금까지 세상은 계속 발전해왔지만 더 이상 좋아질 것 같은 느낌이 없다. 요즘 세대가 품고 있는 무력감과 분노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마도 종수의 분노 및 불안 증상의 배경을 오늘날 청년 세대들이 겪고 있는 미증유의 고통과 연결 짓고 싶었던 모양이다. 


결핍에 관한 이야기 아닐까 싶기도 하다. 종수와 해미는 흙수저 출신의 청년이다. 침대를 놓으면 방이 꽉 찰 정도로 조그마한 원룸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알바를 통해 스스로의 몸뚱아리만 간신히 건사하고 있는 처지다. 그레이트 헝거를 동경하지만 현실은 서울타워에 반사된 햇빛 한 조각만 간신히 창에 들어오는 조악한 환경 속에서 여전히 빚에 쫓기는 신세일 뿐이다. 반면 벤은 포르쉐를 몰고 다니며 강남 노른자 땅 위에 지어진 화려하고 넓은 주택에서 풍족한 생활을 누릴 정도로 종수나 해미와는 차원이 다른 계층이다. 종수와 해미가 물질적인 결핍을 겪고 있다면, 벤은 일종의 정신적인 결핍을 겪고 있는 셈이다. 



종수는 시종일관 불안한 표정과 시선 그리고 행동을 드러낸다. 이에는 그가 사랑하는 해미를 정체 불명의 사내 벤에게 힘 없이 빼앗겼다는 자괴감이 크게 작용하지만, 사실 그의 이면에는 아버지(최승호)의 역할이 한 몫 단단히 거든다. 그의 아버지는 폭행 혐의로 현재 재판을 받고 있으며, 실형의 위기에 처해 있다. 종수는 아버지가 이렇게 된 건 분노조절장애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런 아버지가 너무도 싫다는 종수, 하지만 영화속 그의 행동 역시 아버지의 DNA로부터 그다지 자유롭지 못해 보인다. 



대마초를 피우고 타인의 비닐하우스에 불을 지르는 등 범법 행위임을 알면서도 이를 태연하게 자행하며 희열을 느낀다는 벤에게는 사이코패스적 기질이 엿보인다. 그가 불 태운다는 비닐하우스는 종수를 불안과 분노 속으로 몰아넣으며 파주 일대를 새벽마다 헤매이도록 하는 등 헛심을 쓰게 만들지만, 정작 벤이 말하는 비닐하우스는 우리가 익히 알던 그 비닐하우스가 아닐 공산이 크다. 정신적으로 허기진 결핍을 그만의 끔찍한 방식으로 메우는 일종의 메타포인 셈이다. 



종수의 불안 증상은 여러 경로로 드러난다. 이를테면 해미가 자신의 원룸에서 키우고 있다는 고양이는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해미가 자신이 어릴 적 그 안으로 떨어졌을 때 종수가 구해주었다는 동네 우물 역시 실제로는 존재한 적 없다. 이렇듯 종수가 겪는 사건들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모호하기 짝이 없어 관객들마저 혼란을 겪게 되기 십상이다. 


영화는 해미를 매개로 종수라는 인물의 불안한 심리 상태와 억눌린 분노가 점차 벤을 향해 치닫기 시작하면서 긴장감을 끝까지 늦출 수 없게 한다. 유아인의 열연이 돋보였으며, 신예 전종서의 데뷔는 인상적인 데다 강렬한 것이었고, 최승호 MBC 사장의 출연은 이채로웠다. 미스터리 소설책 한 권을 천천히 완독한 느낌으로 다가오게 하는 영화다. 물론 영화속 이야기는 관객의 관점에 따라 10인 10색 모두에게 달리 다가올 것이다. 열린 결말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감독  이창동


* 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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