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2018년, 탈권위 사회의 원년이 되길 기대합니다

새 날 2018. 1. 1.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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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한 해도 숨가쁘게 흘러갔습니다. 여느 때처럼 많은 사건들이 있었는데요. 지난 해에 벌어졌던 일들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으라 하면 과연 어떤 게 떠오를까요? 짐작컨대 많은 사람들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되는 순간을 선택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난해 3월 10일의 일이었습니다. 이정미 당시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주문을 읽어내려갔습니다. 대한민국의 운명이 뒤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한 마디에 많은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지르거나 비탄에 빠지기도 했는데요. 


이후 대한민국 사회는 많은 변화를 겪고 있는 와중입니다. 긍정적인 변화 말입니다. 이에 따른 성과를 논하기엔 아직 이르지만, 아마도 2018년 올해를 기점으로 본격 궤도에 들어선 뒤 서서히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짐작됩니다.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탄핵 결정문을 읽어 내려갈 당시 앉아 있었던 의자 말입니다. 빨간색 바탕에, 가운데엔 헌법재판소 휘장이 노랗게 그려져 있는 그 의자 말입니다. 위압적으로 다가올 정도로 의자의 등받이가 굉장히 높다랬던 걸로 기억됩니다. 오늘 포스팅은 이 의자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의자는 일상에서 누구나 사용하는, 없어서는 안 될 생활필수품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입니다. 하지만 이의 탄생은 사실 지금과 같은 기능 위주의 물건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의자의 기원은 권좌에서 유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 이집트로 거슬러올라갑니다. 의자는 바로 그 당시 왕조시대의 권좌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의 의자는 순전히 특정 계층의 권위를 상징하는 도구일 뿐, 오늘날의 쓰임새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었던 셈입니다. 안락함을 추구하는 가구로써의 기능이 아닌, 전적으로 왕족과 귀족의 권위를 상징하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이의 흔적은 여러 곳에 남아 있습니다. 'chair'라는 영단어에는 의자라는 의미뿐 아니라 조직의 수장이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습니다. 이의 파생어인 'chairman' 역시 권위를 상징하는 의미로 흔히 활용됩니다. 우리는 여러 목적을 위해 기업 등의 조직을 방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관공서 방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때 직원이 앉아있는 의자의 크기와 모양만으로도 직책을 가늠하게 되곤 합니다. 가죽 등의 고급스러운 재질에 몸 전체를 파묻고도 남을 만큼 넉넉한 공간, 그리고 머리까지 편안히 기댈 수 있는 형태의 의자를 보면 왠지 고위 직책의 자리일 것이라 지레 짐작하게 됩니다. 


누군가 딱히 알려주지 않았음에도 의자만으로 직위를 어림짐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직위와 의자의 모양새가 반드시 정비례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의자의 크기나 모양만으로 직책을 가늠하는 경우가 여전한 걸로 봐선 고대 이집트로부터 기원된 의자의 원래 쓰임새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권력욕과 그에 따르는 권위를 함께 누리고 싶어하는 건 인간이 오래 전부터 목말라 하며 채우고 싶어하던 기본적인 욕구 가운데 하나이기에 쉽게 사라지지 않는 성질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울신문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보겠습니다. 헌법재판소는 대한민국 헌법에 관한 분쟁이나 의의를 사법적 절차에 따라 해결하는 곳입니다. 실정법 가운데 최고의 규범인 헌법을 다루는 기관이다 보니 아무래도 그에 걸맞은 권위 부여는 필요악일지도 모를 텐데요. 의자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입니다만,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이 앉는 의자 역시 권위 부여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위압적인 등받이의 높이와 분위기가 딱 그렇습니다. 헌재를 드러내는 일종의 상징물에 가까웠 보였습니다. 


그런데 해당 의자는 생각보다 역사가 깊습니다. 헌법재판소가 출범한 건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0년 전의 일인데요. 현행 헌법 체제인 1987년 개정 헌법을 통해 헌법재판소제도가 도입된 뒤 1988년에 최초로 구성된 바 있습니다. 그러니까 빨간색으로 칠해진 등받이가 긴 이 의자는 30년 전에 도입되어 대심판정에 놓였으며, 헌법재판관들이 주요 사건을 심리하거나 선고할 때마다 그 자리를 지켜온 셈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주문이 읽힐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9개에 달하는 이 재판관 의자가 최근 모두 교체되었다는 소식입니다. 경향신문의 단독보도에 따르면 헌재가 지난 11월 대심판정의 재판관 의자를 모두 교체했다는 것입니다. 새로 들여온 의자는 기존의 것과 많이 달랐습니다. 일단 등받이 높이가 낮아졌으며, 권위의 상징이기도 한 노란색 헌재의 휘장 또한 새겨져 있지 않다고 합니다. 기존의 것은 목재였는데, 새 의자는 가죽 재질인 점도 달랐습니다. 



교체의 이유는 기존의 의자가 나무 재질인 탓에 재판관들이 불편함을 호소해왔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만, 이참에 헌재는 권위를 벗어던지고 국민들에게 좀 더 친숙하게 다가가려는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보입니다. 의자만을 놓고 본다면 권위보다는 실리를 택한 흔적이 역력한데요. 이전의 것이 기능적인 측면보다는 권위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면, 새 것은 기능에 주안점을 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비록 작은 노력입니다만, 아울러 가까운 훗날 이를 돌아볼 때 형식적인 제스처로 그칠지도 모를 일입니다만, 이러한 작은 것에서부터 권위를 벗어던지고 국민들에게 다가서려는 모습은 매우 반갑게 다가옵니다. 탈권위를 지향하는 헌법재판관들의 의지가 단순히 의자 교체로만 끌나는 게 아닌, 본격적인 탈권위 사회의 마중물이 될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습니다. 2018년 새해에는 사회 모든 영역에서 아무쪼록 이 기세를 계속 몰아 탈권위의 원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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