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제천 화재는 소방관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새 날 2017. 12. 26.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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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성탄절에 열린 자유한국당 원내대책회의에서 김성태 원내대표는 제천 화재 참사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제까지 화재현장에서는 소방장비와 인력 부족을 이야기하는데, 우선 고귀한 인명부터 구하는 헌신과 희생을 두고 소방장비와 인력 부족을 이야기하는지, 그동안 119에 적극적 예산 지원과 인력 뒷받침만 했지 이 사람들에 대해서 따끔하고 냉철한 지적은 없었다. 정치권뿐만 아니라 언론에서도 이번 사항에 대해 국민들에게 냉철하게 실태를 알려드려야 할 의무가 있다. 이번 참사는 100% 인재다”


그에 앞서 24일 제천 화재 현장을 찾은 뒤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오죽하면 피해자 가족이 인근의 군부대에 연락하여 소형 박격포로 쏘아서라도 저 유리창을 깨 달라고 절규했는데 현장 지휘관은 답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정작 하고 싶었던 주장은 아무래도 이런 류의 것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참사와 관련하여 행정안전부 장관의 사퇴와 소방방재청장의 즉각 파면을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이제야 알 것도 같습니다. 왜 이들이 이번 제천 참사에서 그토록 소방관의 초동 대처에 대해 부러 논란으로 키우면서까지 끈질기게 물고늘어지고 있는가를.. 본색을 드러낸 것입니다. 


ⓒ뉴스1


하지만 과연 이분들이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알다시피 소방관은 지방직공무원입니다. 따라서 지자체의 예산 등 경제 여건과 자립 능력에 따라 그 규모와 수준은 현격하게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SBS가 최근 보도한 기사 내용을 보면 대도시와 지방 사이의 소방인력의 격차가 얼마나 극명한지 알 수 있습니다. 사례를 들고 있는데요. 서울교대 체육관 증축 공사현장에 불이 났을 당시 신고 4분 만에 서초소방서에서 마흔두 명이 출동했으며, 이후 일흔다섯 명까지 소방관 인력이 늘었다고 합니다. 반면 이번 제천 화재 현장에 처음 도착했던 소방대원은 고작 13명뿐이었다고 합니다.


화재 신고가 접수되고 첫 출동 시점부터 40명가량의 소방대원이 출동할 수 있는 지역은 서울과 일부 대도시뿐인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서울특별시만 정부가 정해놓은 필요 인력의 90% 정도를 확보했을 뿐, 광역시는 70%를 간신히 넘어서는 수준이며, 이번에 화재가 난 제천이 소속된 충청북도는 필요 인력을 절반도 못 채운 전국 최하위권 수준이라고 합니다. 더구나 장비 노후화는 더욱 심각해 충북의 소방차 가운데 4분의 1은 이미 사용 연한을 넘긴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주장과는 달리 소방장비와 인력 부족 등 소방관들의 처우를 지적해야 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수순으로 보이는데요.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출동한 소방관들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왔던 건 과연 무얼까요? 언론에도 알려졌다시피 바로 건물 옆 2톤짜리 LPG 저장 탱크였습니다. 이것이 폭발할 경우 건물 전체가 폭삭 주저앉게 되는 건 말할 것도 없거니와, 최악의 경우 자칫 주변 건물로 화재가 번질 수도 있는 노릇입니다. 때문에 당시 소방관들은 이의 폭발을 막기 위해 열기를 식히는 일에 주력했던 겁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일부 유가족들은 왜 2층 유리창을 깨는 등 적극적으로 구조에 나서지 않았느냐며 초동 대처에 의문을 제기하는 등 논란으로 불거진 실정입니다. 


일단 인력이 태부족인 상황에서 2톤짜리 LPG 저장 탱크의 폭발을 막는 일이 급선무였을 것으로 짐작되게 합니다. 아울러 소방 전문가에 따르면 무턱대고 유리창을 부술 경우 백드래프트의 위험에 노출될 수 있기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유 외에도 소방관들이 적극적인 구조 작업에 몰두할 수 없도록 하는, 제동 역할을 톡톡히 했던 아주 중요한 사실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소방관들이 구조활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타인에게 피해가 발생할 경우 그동안 이를 소방관 개인에게 책임을 물어왔습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지난 6년 동안 30억 원에 가까운 손해배상이 소방관 개인에게 청구되었다고 하는데요. 그동안 구조활동을 하면서 소송에 휘말리는 소방공무원들이 부지기수였다고 합니다. 이를 어찌 생각해야 할까요? 어렵사리 시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켰건만, 그들에게 돌아오는 건 오히려 소송이었다고 하니 말입니다. 이러다 보니 구조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그 움직임이 위축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을 텐데요. 


ⓒ연합뉴스


다행히 소방관이 화재 진압이나 긴급 구조 등 소방활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발생하더라도 고의나 중대 과실이 없는 한 형사상 책임이 줄거나 면책되도록 한 소방기본법 개정안이 지난 19일 국무회의를 통과했습니다. 하지만 이의 시행은 공포 후 6개월 뒤이기에 그나마 이번 제천 화재는 적용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이번 참사에서 소방관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화재 진압에 나설 수 없었던 숨은 이유이기도 할 텐데요. 


그런데 이러한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아울러 그에 대해 일말의 책임을 안고 있기도 한 자유한국당의 원내대표라는 작자가 박격포 얘기까지 들먹이면서 소방관들의 초동 대처 방식에 문제점을 제기하고 나선 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상식 밖의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이번 참사에서도 주차 문제가 심각하게 불거졌는데요. 가로막은 차량들 때문에 골든타임마저 놓친 대목에서는 여전히 열악한 시민들의 안전불감증을 탓하게 됩니다. 마음 같아서는 불법주차된 차량들을 강제로 견인해 가거나 그냥 한쪽으로 밀어붙여서라도 소방도로를 확충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한데요. 그나마 앞서 언급한 소방기본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소방차가 이동 시 길을 터주지 않거나 소방관의 구조 및 구급활동을 방해할 경우 과태료나 벌금을 물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또한 6개월이 지난 뒤부터 시행됩니다만.



하지만 소방관들이 제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면책 범위를 넓혀주는 법안들, 즉 불법주차된 차량을 강제로 견인하거나 파손시켜도 책임을 물리지 않도록 하는 취지의 법 개정안들이 현재 여러 건 발의된 상황인데 이번 임시국회에서도 정쟁 때문에 통과되지 못하고 이 법안들은 여전히 계류 중입니다. 헌법 개정 특위의 활동기한 연장을 놓고 여야가 대립하면서 12월 임시국회 본회의조차 열리지 못한 것인데요. 따라서 임시국회의 회기는 자동으로 내년 1월 9일까지 연장된 상황입니다. 다름 아니라 바로 이러한 정치권의 무책임한 행동이 민생을 위협하는 최대 위험 인자였던 셈입니다.


시민들의 피부에 직접적으로 와닿는 생명과 안전에 관한 법안 처리는 정작 등한시한 채 이번 참사를 소방관들의 초동 대처 잘못으로 몰고가려는 원내 제1야당은 세월호 참사와 이후 무수한 재난 상황에서 자신들이 어떻게 대처하고 처신했던가를 모두 잊기라도 한 걸까요? 자유한국당이 진정으로 민생을 생각하는 정치 집단이 맞다면, 어려운 환경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소방관들의 노고에 흠집을 내어 이를 연결고리 삼아 어떡하든 이번 정권을 흔들려는 작태를 당장 그만두고,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관련 법안 처리에나 몰두해야 함이 옳지 않을까요?


제천 화재 참사는 절대로 소방관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어깨를 활짝 펴고 당당히 고개를 드십시오. 저희는 당신들이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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