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저냥

다중 편견마저 넘어선 반전 '복면가왕'

새 날 2015. 6. 8.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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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로 인해 세상이 온통 뒤숭숭하다.  그다지 신경 쓰고 싶지 않지만, 사회적 동물에 속하는 나라고 하여 별 수 있으랴 싶다.  사실 연일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확진환자와 사망자 숫자를 접하다 보면, 일반인들에게 와닿을 공포감이 괜한 호들갑이나 설레발이 아닐 것이란 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된다. 

 

그래, 때마침 주말이고 하니 웬만하면 집에서 뒹굴거리는 게 최고의 덕목 아니겠는가.  버릇처럼 노트북의 전원을 켠다.  높은 기온 탓인지 무의식 중 돌아다니던 각종 사이트와 커뮤니티 사이 어느 지점에서 가끔 길을 잃거나 정신이 몽롱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잠깐 누운 채 눈을 붙이곤 한다.  누군가는 치열하게 바이러스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마당에 난 너무도 한가로운 데다 편안한 게 아닌가 싶어 괜시리 미안해지는 순간이다.


이렇게 휴일 오후를 소일 중이며, 아내 역시 평소와 다름없이 TV 앞에 앉아 있다.  어쩌면 작금의 풍경이 나와 아내의 가장 흔한 일상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각자 좋아라 하는 매체를 붙든 채 세상과 소통하는 시간, 하루 중 가장 한가로운 시점일 테니 말이다.  난 가끔 아내가 몰두하고 있는 드라마가 무언지, 또 프로그램이 무언지 안 보는 척하며 슬쩍슬쩍 곁눈질로 확인하곤 한다.  특별히 예쁜 배우가 나오거나 관심있는 대목에선 아내에게 어떤 상황이냐며, 또 저 사람 누구냐고 묻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관심 끊어" 라는 무척 싸늘한 핀잔만이 돌아오기 일쑤다.  흥~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때마침 내가 알고 있는 몇 개 안 되는 예능 프로그램 중 하나가 전파를 타고 있었다.  가면을 쓰고 노래 경연을 펼치는 프로그램이다.  물론 내가 이 프로그램을 알고 있는 것과 관심을 갖는다는 건 전혀 별개의 사안이지만 말이다.  노래를 유독 좋아하는 아내는 이미 해당 프로그램에 푹 빠져든 모양새다.  가면을 착용한 저 가수는 분명 누구일 거라며 미루어 짐작하는 놀이에 심취하고 있었다.

 

ⓒMBC 방송화면 캡쳐

 

그때다.  가수 왁스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물론 가면을 쓴 이가 부르고 있다.  아내가 내게 말한다.  저건 틀림없이 왁스일 거야.  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내가 빚어놓은 현 상황에 자연스레 끼어들고 말았다.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네.  가면을 쓰는 목적이 누구인지 모르도록 하기 위함일 텐데, 자기가 불렀던 노래를 저런 상황에서 부른다고?"

 

아내의 반박 논리가 이어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단순한 나처럼 생각하기 쉬울 테니 반대로 그 편견을 깨기 위한 시도라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일반적인 편견을 한 차례 비튼, 다중편견 깨기 시도쯤이라고 할까.  그러면서 왁스가 아닌 것처럼 창법을 달리해서 부르고 있지만, 아내가 볼 땐 분명 왁스의 흔적이 엿보인단다.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난 분명 다른 여자 가수일 것이라 생각했다.  창법이나 목소리는 어딘가 낯익은 느낌이다.  그러나 내게 있어 그 출처를 밝혀내기엔 너무도 아득하거나 생소한 영역이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난 다시금 내 일에 몰두했다.  그런데 얼마후 그 왁스 노래를 부르던 가수가 다른 이와의 경연에서 탈락하며 정체를 드러내고 만다.  놀랍게도 백청강이라는 남자 가수였다.  헉.. 무언가 둔탁한 물체로 머리통을 한 대 세게 얻어 맞은 느낌이다.  이쯤되면 아내가 논리를 폈던 다중편견 따위마저 가볍게 넘어서는 일대 반전이 아닌가.  허를 찔린 셈이다.  여성 톤으로 완벽하게 소화한 이 노래를 남성이 불렀으리라곤 미처 상상조차 못한 탓이다.

 

평소 지독한 편견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고 있는 내게 무언가 신선한 충격이자 일깨움으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가히 편견 깨기의 역대급이라 할 만하다.  마치 반전에 모든 것을 걸었던 어떤 영화보다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복면가왕이라는 프로그램만이 지닌 특별한 장점을 한껏 살린, 멋진 연출이 아니었는가 싶다.  물론 백청강이라는 훌륭한 가수가 존재했기에 가능한 연출이었을 테지만 말이다.  가면을 벗고 보니 원래 미성이 특징이었던 백청강의 모습이 왁스의 노래 위에 덧칠된 느낌이다.  그렇구나, 그의 목소리가 이랬구나.  그동안 그가 여성 톤을 소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지내왔던 셈이다.  아니 실은 백청강의 존재를 아예 잊은 채 지내왔다는 표현이 더욱 정확할 듯싶다.

 

수년전 '위대한 탄생'을 통해 화려하게 등장했던 백청강, 사실 그는 여성들도 탐낼 만큼 아름다운 미성의 소유자다.  얼마전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은 뒤부터 우리 시야에서 사라졌던 그가 멋진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신문 기사를 찾아보니 2년동안 직장암 치료를 위해 활동을 접었었고, 현재는 완치된 상태란다.  너무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의 컴백은 엄청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인기 아이돌 가수의 그 어떠한 화려한 방식보다 훨씬 멋지면서도 무언가 깨달음 따위가 느껴지게 한다.  백청강이란 가수와 복면가왕만이 함께 빚을 수 있는 특별한 상승효과 덕분이리라.  백청강, 그의 활동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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