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나는 위로 받을 자격이 충분해 '나는 오늘도 소진되고 있습니다'

새 날 2018. 5. 31. 19:34
반응형

수 년 전 '아무 것도 안 하고 싶다, 격렬하게 아무 것도 안 하고 싶다' 라는 광고 카피가 인기를 끈 적이 있다. 이 광고 속에서 배우 유해진은 자못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으나 평소 코믹한 배역을 많이 맡아온 터라 제아무리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여도 솔직히 웃음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이 광고가 당시 인기를 끌었던 건 그만큼 일에 치여 지친 사람들이 많았노라는 방증일 테다. 광고 카피 하나가 응어리진 자신들의 속마음을 속시원히 풀어헤치며 현재의 처지를 대변해주는 듯 무언가 짜릿하고 통쾌한 느낌으로 다가왔기 때문일 테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한 취업 포털 사이트가 직장인 10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9.4%가 번아웃 증후군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번아웃 증후군이란 오랜 기간 느끼는 피로감과 업무에 대한 흥미도 저하를 설명하는 심리학적 용어로서, 의욕적으로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갑자기 극도의 신체적, 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며 무기력해지는 현상을 말한다. 



이의 구체적인 증상으로는 귀차니즘과 무기력증으로 대변된다. 평소 잘 해 오던 업무에 대해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고, 어느 순간부터 열정을 잃은 채 퇴근한 뒤에도 비슷한 증상이 이어져 매사에 활력을 잃은 모습으로 발현된다. 아울러 우울감에 쉽게 빠져들며 일상을 통해 행복감을 누리지 못 한다. 직종과 무관하게 과도한 업무로 인한 심신의 에너지 고갈과 매사에 무관심 또는 냉소적 반응을 드러내며, 업무 성과 저하 따위의 증상으로 나타난다. 


번아웃 증후군은 겉으로 볼 땐 우울증과 유사하다. 우울증은 우울감, 의욕상실, 체중감소, 불면증, 과다수면, 심신불안, 죄책감, 사고력 저하 등의 증상으로 발현되는 경우를 말한다. 번아웃과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일이나 노동과의 구체적인 연관성이 없다는 점일 테다. 번아웃은 복잡한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질병이다. 특히 독립적이며 성공지향형의 사람들이나 착한 사람 증후군을 앓고 있는 이들에게 유독 많이 발생하는 경향이 있다. 


번아웃을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은 대개 업무 환경과 관련이 있다. 시스템적인 문제에 해당하나 대한민국 사회에서 이는 여전히 개인이 해결해야 하는 사안이다. 이 책은 일에 지치고 관계에 치여 무기력증과 피곤함이 일상이 된 사람들에게 한의사인 저자가 그의 이론과 다양한 사례를 통해 번아웃 증후군을 극복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 즉 건강하고 활기찬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독자에게 제시해준다. 



총 4개의 장으로 분류돼 있는데, 1장에서는 번아웃 증후군이란 무엇이며 왜 발생하는지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긴급 처방을 안내한다. 2장에서는 저자가 의료 현장에서 실제로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경험한 다양한 사례들을 풀어놓는다. 3장에서는 번아웃 극복을 위한 마음가짐에 대해,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다양한 방식의 구체적인 솔루션을 제시한다. 환자들의 치유를 도우면서 혹은 자신조차 번아웃 증후군을 앓다가 이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경험하면서 터득한 전문가의 친절한 극복 방법이 소개돼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구체적인 치유 방법들보다 정작 내게 가장 인상 깊게 와닿았던 건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너무나 지치고 힘들어,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을 때가 간혹 있다. 다만, 무한 책임을 지고 있는 어른이라는 이유로 인해 이를 내색하지 못 한 채 나홀로 끙끙 속앓이를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어른이 되고 점차 나이가 들어가면서 체감되는 무게감은 이렇듯 육중하다. 그러나 어른이라고 하여 무조건 힘든 일을 참고 표현하지 않는 존재여서는 안 될 것 같다. 힘들 땐 힘들다고 토로하며 위로 받고 싶은 건 애나 어른이나 매한가지일 테니 말이다. 


저자는 너무나 힘들고 지쳐 있는 내담자에게 단지 지친 마음을 헤아려주는 말 한 마디만을 넌지시 건넸을 뿐인데 눈물을 또르르 흘리더라는 상담 사례를 예시로 들면서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게 무언지를 강조하고 있다. 그 내담자나 나의 처지가 어딘가 모르게 닮아 있다는 느낌은 괜한 게 아닐 테다. 곁에서 누군가 지친 현재 나의 마음을 알아주고 달래주는 말 한 마디를 건넨다면, 아울러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고 기댈 곳도 없는 막다른 상황에서 누군가 내 마음을 어루만지며 위로해준다면 왠지 눈물이 핑돌 것만 같다. 이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 아닐는지.. 



국립공원도 지친 자연 생태계를 일정 기간 동안 쉬도록 하기 위해 자연 휴식기를 갖곤 한다. 필리핀의 세계적인 유명 휴양지 보라카이섬은 환경 정화를 위해 일시 폐쇄를 선언했다. 뿐만 아니다. 태국에서도 유명 섬 관광지들이 잇따라 문을 걸어 잠그거나 관광객들의 숙박 금지령을 내리고 있다. 밀려드는 관광객들 때문에 바닷속 생태계 등 자연환경의 훼손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자 쉼을 제공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다. 하물며 관광지도 지쳐 휴식을 취하고 있거늘 사람의 경우는 더 말해 봐야 입만 아플 테다. 급격하게 소진되고 있는 우리에겐 쉼이 절실하다.


저자는 심신이 지치고 피로해진 우리에게 거울을 바라보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고 다독이는 시간을 가져보라고 조언한다. 매일 매일 수고하고 있는 우리는 위로 받을 자격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보는 건 어떨까?


"토닥토닥~ 나는 아주 잘 하고 있는 거야.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



저자  이진희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