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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접 경험의 즐거움 552

봄을 기다리며... 소설 <겨울을 지나가다>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나이 71세. 췌장의 꼬리 부분에 또아리를 튼 악성 종괴는 발견 당시 이미 췌장의 경계를 넘어 엄마의 몸 구석구석을 마구 헤집어 놓은 상태였다. 병원 치료를 포기한 엄마는 집에서 임종을 맞이하겠노라 선언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딸 앞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하게 된다. 예고된 엄마의 죽음. 하지만 맞딸 정연에게 엄마의 부재란 너무도 낯설고 두려운 경험이었다. 생전 엄마와 정연의 사이가 각별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엄마는 남편 없이 두 딸을 성장시켰으며, 정연은 동생 미연과 달리 아직 미혼이었다. 정연은 동생 미연과 함께 엉겁결에 장례를 치르고 뒷일을 마무리하게 된다. 이후로는 온전한 추모의 시간. 정연은 엄마와의 추억을 되짚으며 엄마가 살아온 삶과 자신의 그것을 조용히 반..

영화 <그녀가 죽었다> vs <드라이브>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영화 와 는 닮은꼴이다. 장르가 스릴러라는 점에서 그렇거니와 근래 한창 상종가인 유튜버라는 직업인을 주연으로 내세운 점도 그렇다. 동일한 장르이다 보니 극의 전개 과정이나 전체적인 얼개도 엇비슷하다. 약간은  비대칭의 데칼코마니라고 할까.  공인중개사 구정태(변요한)는 묘한 취미를 갖고 있다. 집주인 혹은 임차인이 부동산을 매매하거나 세를 놓기 위해 자신에게 맡겨 놓은 열쇠를 이용하여 타인의 삶을 훔쳐보곤 한다. 구정태의 관음증은 관찰 대상의 폭이 넓다. 직무상 접하는 주택뿐 아니라 특별히 관심이 닿는 사람에게까지 그만의 예민한 촉수를 몰래 뻗곤 한다. 인기 유튜버 한소라(신혜선)도 그의 관심권 안에 들어왔다. 선행 컨셉으로 한창 인기몰이 중인 한소라. 구정태는 문득 그녀의 실체가 ..

한 인터뷰어의 성장기... 도서 <태도의 언어>

는 성장기다. 기자라는 직업인으로 성장해 오면서 저자가 느꼈던 무수한 감정이나 생각의 조각들을 태도라는 꾸러미 안에 차곡차곡 쟁인 뒤 예쁘게 포장하여 진열대 위에 올려놓은 도서 상품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많고 많은 단어 중에 왜 하필 '태도'에 필이 꽂힌 걸까. 태도란 '어떤 일이나 상황 따위를 대하는 마음가짐. 또는 그 마음가짐이 드러난 자세'를 일컫는다. 책 안에는 그녀가 그동안 기자로서, 인터뷰어로서 어떤 마음가짐과 자세로 임해 왔는지 오롯이 담겨 있다. 큰 맥락으로 볼 땐 기자와 동일한 직업 범주에 속하겠지만, 저자는 특별히 인터뷰어로서의 김지은을 좀 더 부각시키고 싶었던 것 같다. 누구든 특정 분야에서 오랜 시간 몸 담다 보면 이 일을 계속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한 번쯤 심각한 고민에 빠져드는 ..

공감해 주는 단 한 사람이 필요한 이유... 도서 <당신이 옳다>

학교에서 친구와 싸운 뒤 교사로부터 혼이 난 아이에게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며 충고한 엄마. 그러자 아이는 이렇게 말했단다. "엄마는 그러면 안 되지, 내가 왜 그랬는지 물어 봐야지. 선생님도 혼내서 얼마나 속상했는데, 엄마는 나를 위로해 줘야지. 그 애가 먼저 나에게 시비를 걸었고 내가 얼마나 참다가 때렸는데, 엄마도 나보고 잘못했다고 하면 안 되지." 칠칠맞게도 이 대목을 읽어 내려가는 도중 내 두 눈에서는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왜일까.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의 사연이지만, 아이 둘을 키웠던 과거를 떠올리면서 '나도 저렇게 행동했을 텐데, 어쩌나' 하는 안타까움 때문이었으리라. 아이들이 다 커버렸으니 이젠 이를 만회할 기회조차 없다. 아니면 문득, 비슷한 상황에서 부모님께 혼나거나 충고를 들었..

글은 무엇보다 강하다... 영화 <9명의 번역가>

베스트셀러 시리즈물인 '디덜러스'의 마지막 편이 완성되어 출간을 앞두고 있다. 이번 프로젝트의 진행을 맡아 총괄 지휘에 나선 에릭(랑베르 윌슨)은 해당 도서를 총 9개의 언어로 번역하여 전 세계에 동시 출간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영어, 독일어, 중국어 등 각기 다른 언어 번역가 9명이 긴급 공수되어 프랑스 모처로 불러들여진다.  번역가들이 머무르게 될 공간은 외부와 완벽히 차단된, 일종의 밀실. 러시아 국적 보안 요원들에 의한 삼엄한 경계가 펼쳐지고 내부 직원들의 촘촘한 감시 활동까지 더해진 통제 시스템 속에서 번역가들은 두 달 동안 숙식을 하며 번역 작업을 마무리하게 된다. 도서 내용의 사전 유출을 막기 위한 조치다. 그러던 어느 날, 에릭의 휴대폰으로 메시지 한 통이 배달된다. '수 시간..

진실이라는 모호함.. 영화 <유코의 평형추>

유코(타키우치 쿠미)는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3년 전 발생한 여고생 괴롭힘 자살 사건 관련 다큐를 제작 중이다. 당시 한 여고생과 교사의 잇따른 죽음이 일으킨 파장은 컸다. 학교의 섣부른 대응과 언론의 그릇된 보도 관행, 여기에 무분별한 SNS 퍼나르기까지 더해지면서 이미 숨진 피해자는 물론이거니와 가해자의 가족 등 또 다른 피해자까지 양산됐다. 이들의 고통은 현재진행형이다. 평소 진실을 추구해 온 유코. 그녀는 사건 이면에 내재된 폭력적 실체를 카메라 앵글에 담아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었다. 그녀는 세상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 죽여 살아가는 가해자의 가족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절절한 사연에 귀 기울이고, 취재 방향성에 대해 사사건건 트집 잡는 방송국과는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는 등 나름의 신념을 지키기..

맨몸으로 불의에 맞선 소녀.. 영화 <불도저에 탄 소녀>

학교를 그만두고 세상에 마치 저 혼자만 존재하는 양 거친 방식으로 살아온 혜영(김혜윤)에게 어느 날 걸려온 전화 한 통. 그녀의 아버지 본진(박혁권)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내용이다. 본진은 며칠 전에도 일하던 도중 화상을 입었던 터라 혜영의 가슴은 다시 한 번 철렁 내려 앉는다. 다급히 병원을 찾은 혜영. 그녀가 맞닥뜨린 건 의식을 잃은 채 병원 침대 위에 무심히 누워 있는 본진의 몸뚱어리였다.  사고 피해자들이 거액의 합의금을 요구해 오는 상황. 평소처럼 악다구니를 써가며 과한 몸짓으로 이 상황을 벗어나려 애써 보지만 혜영 스스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마냥 이럴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혜영과 본진 그리고 동생 혜적(박시우)의 보금자리이자 본진이 운영해오던 중..

풀꽃시인의 행복하게 사는 법.. 도서 <나태주의 행복수업>

고향인 충남 서천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공주에서 문학관을 운영하며 풀꽃을 가꾸고 살아가는 시인. 이른바  '풀꽃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나태주다. 그는 1945년생, 우리 나이로 올해 여든살이다. 조급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향해 너무 잘하려 애쓰지 말라던, 예쁘지 않은 너에게도 어여쁘다며 진정으로 응원해 주던 노시인을 인터뷰어 김지수가 만났다.  도서 은 작가이자 인터뷰어인 김지수가 2023년 2월부터 5월까지 매주 한 차례 충남 공주의 풀꽃문학관을 찾아 나태주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나눈 대화를 써내려간 에세이이자 여행기다. 두 사람이 나눈 정겨운 대화는 새초롬하게 내민 봄의 햇살처럼 풋풋하고 따사롭기 그지없다. 긴장으로 굳게 닫혀 있는 독자의 몸과 마음의 빗장을 스르르 열리게 해 줄 것이다. 나태주 시..

이 가냘픈 소년이 걷는 터널 끝엔 무엇이 있을까.. 영화 <검은 소년>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훈(안진호)은 작가가 꿈이다. 그에겐 소박한 바람 하나가 있다. 생이별 중인 엄마 소연(윤유선)이 자신의 곁에 머물면서 좀 더 자주 보게 되는 일이다. 훈은 틈만 나면 공중전화부스로 향했다. 소연과 통화하기 위해서다. 아빠 무진(안내상)의 눈을 피해 주로 학교에서 이용하곤 했다. 훈은 그날도 여느 때처럼 공중전화부스로 향했다. 연락이 닿지 않아 평소보다 더욱 자주 들락거린 듯하다.  소연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근래 도통 통화가 되지 않아 훈의 마음은 좌불안석이다. 우여곡절 끝에 소연과의 통화에 성공하는 훈. 잘 있단다. 순간 얼굴에 화색이 돈다. 소연을 염려하는 훈의 마음과 훈을 걱정하는 소연의 마음이 동시에 맞닿은 걸까. 따듯하다. 집으로 향하는 훈의 발걸음도 한층 가벼워..

5월 광주, 항쟁에 나선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 영화 <1980>

1980년 5월 17일 전남 광주.평생을 중식 요리에 몸 담아온 철수 할아버지(강신일)가 자신의 중국집을 개업했다. 식당 이름은 '화평반점'. 철수 엄마(김규리)와 아빠(이정우), 삼촌(백성현), 그리고 이모(민서)까지, 모든 가족이 발벗고 나서서 바쁜 개업 일손을 돕는다. 평판이 좋고 요리 솜씨가 뛰어난 덕분에 식당은 연일 문전성시다. 며칠 뒤 한 무리의 군인이 식사를 위해 화평반점에 들어선다. 그 무렵 광주 시내에서는 연일 군중집회가 개최된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계엄령이 선포돼 무장군인까지 투입되는 등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화평반점 사람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시민들은 작금의 상황이 자신과는 거리가 멀다고 여긴 탓에 느닷없는 군인 무리의 등장은 식당 주변을 금세 술렁거리게 했다. 광주는 하루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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