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내향적인 사람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책 '센서티브'

새 날 2018. 5. 30.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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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수 년 전의 일이다. 지역의 한 여성센터에서 심리학 관련 강의를 수강한 적이 있다. 당시 강사로 나선 사람은 모 대학 교수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 날은 심리 유형을 학습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수강자를 대상으로 한 간단한 모의 테스트도 이뤄졌다. 강사는 각자의 테스트 결과를 놓고 내향성으로 나온 사람들 더러 손을 들라고 했다. 영문을 모른 채 몇 사람이 조심스럽게 손을 든다. 강사는 다음과 같은 취지의 말을 했다. 


"저는 외향성입니다. 반드시 그렇기 때문 만은 아니지만 어쨌든 전 외향성의 사람이 좋아요. 내향성의 사람들은 피곤하거든요" 


놀라운 발언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다른 과목도 아닌, 무려 심리학이라는 과목을 가르치는 사람이었다. 특정 성향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가치판단을 내리는 건 누구보다 객관적인 위치에 있어야 할 사람이 결코 해서는 안 될 행위였다. 심리학을 전혀 모르는 문외한이더라도 그런 자리에서 특정 성향을 논하는 행위가 적절치 못 하다는 사실 정도는 쉽게 인지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심리학을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특정 성향으로의 기울어짐 없는 강의가 이뤄졌어야 했는데, 그녀는 아예 대놓고 어떤 성향은 좋은 것이며, 그 반대의 성향은 좋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난 나의 귀를 의심해야 했다. 기본적인 자질조차 갖추지 못 한 사람이 어떻게 대학 강단에 서서 관련 학문을 가르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지역 사회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강의까지 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스럽기 짝이 없었다. 


비단 직접 겪은 사례를 들었지만, 이 경우가 아니더라도 세상은 활동적이며 외향적인 사람을 더 좋아하고 잘 대우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학교가 됐든 직장이 됐든 커뮤니티가 됐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으레 적극적으로 앞에 나서서 사람들을 이끌며 밝은 분위기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이 단연 인기를 끈다. 이들은 자기주장이 강하다 보니 공동체의 분위기를 주도하며 이내 주류로 자리 잡아간다. 세상은 그들이 중심이 되고, 모든 게 그들에 의해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 보니 남들처럼 활기 넘치는 법을 배워야 한다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향한 압박이 기승을 부린다. 이는 주류가 비주류를 향해 당신들은 '틀렸어' 라고 외치는 현상의 연장선에 가깝다. 이 시대의 문화가 활기 넘치는 행동 양식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에서 리더십은 최고의 덕목으로 받아들여지기 일쑤이고, 덕분에 리더십을 다루는 각종 강연이나 도서류 역시 상종가다. 취업을 앞둔 취준생들의 자소서에는 으레 리더십 이야기가 포함돼 있기 마련이다.



남들처럼 그럴 듯하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다수는 그들처럼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다 보니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부담감을 이기지 못해 불안과 분노에 노출된 채 힘겹게 살아가곤 한다. 인간관계의 폭이 넓으며, 활기차게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성격이 최고의 덕목으로 받아들여지는 요즘 시대에 타인보다 상대적으로 민감하고 비활동적인 사람은 무언가 까다로운 데다가 비사교적이고 신경질적이며 심지어 자신의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고 여겨지기 십상이다. 


아니, 세상의 주류가 워낙 외향성을 띤 사람들 위주이다 보니 그렇지 못한 성향의 사람들은 일종의 결함을 안고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지기 일쑤다. 서두에서 언급한 심리학 강사 역시 자신의 본분을 저버린 채 그러한 세상 분위기에 편승해 올라타 있는 형국이니 말이다. 파워풀한 에너지와 외향적인 성향을 높이 평가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남들보다 민감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자괴감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상대적으로 자존감이 더욱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 책 '센서티브'의 저자 일자 샌드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다섯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남들보다 민감한 성향을 지닌 채 태어난다고 한다. '남들보다 민감한 사람들을 위한 섬세한 심리학'이라는 부제가 붙은 '센서티브'는 이렇듯 남들보다 민감하고 예민한 이들을 위한 책이다. 


앞서도 언급했듯 세상은 더 강해져야 하며 남들처럼 즐기면서 사는 방법을 배우라고 끊임없이 부추기는 분위기다. 덕분에 민감한 사람들은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울 수가 없다. 아예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민감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남들과 비슷하게 보이도록 하려고 부단히 노력해 왔을 터다. 그 가운데 일부는 성공을 거뒀을지도 모른다. 비록 겉 모습만이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다수는 남들을 결코 따라갈 수 없음을 깨닫고 이내 좌절 속으로 빠져든다. 사람의 타고난 성향이 어찌 쉽게 바뀌겠는가.



그러나 저자는 민감한 사람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고 힘주어 말한다. 남들보다 그저 민감한 성격을 지니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남들보다 민감한 사람들은 특별히 예민한 신경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까닭에 숨어 있는 뉘앙스를 오히려 훨씬 더 잘 인식하고 풍부한 상상력과 내면 세계를 갖추고 있을 가능성이 높단다. 즉, 민감함은 고쳐야 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높이 평가 받고 있는 창의력과 통찰력 그리고 열정 등은 대부분 이 민감함이라는 재능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민감하지 않은 사람들과 성향만 그저 다를 뿐이다. 


사람의 성격이나 성향은 옳고 그름으로 판단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자기 주장이 강하고 목소리가 큰 사람들이 주류인 사회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 한 사람들은 일종의 결함이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지기 십상이다. 여전히 옳고 그름이라는 가치판단이 끼어들고 있다. 더구나 그러한 편견을 부지불식 간에 대중들에게 설파하는 사람들이 강단에 서서 활약하고 있기까지 하다. 


다행히 이 책의 저자는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외면하고, 마치 결함이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내향적이며 민감한 사람들에게 주목하고 나섰다. 어느 누구보다 많은 것을 상상하고 창조하는 민감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우며, 위로를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편견을 깨려는 저자의 시도에 박수를 보낸다.



저자  일자 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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