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죽음으로 형상화한 세기말적 분위기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새 날 2018. 5. 26.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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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 잡지와 신문을 꼼꼼이 읽는다. 그 가운데서도 특정인을 찾는 구인광고나 잘 나가던 회사가 급작스레 부도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경제 기사 따위에 주목한다. 특히 부고 기사만큼은 절대로 빼놓지 않는다. 이쯤 되면 나의 직업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짐작 가능할 법도 하다. 그렇다. 나는 자살도우미다. 그동안 나는 의뢰인의 이야기들을 꼼꼼이 기록해 왔다. 물론 모든 의뢰인들의 이야기가 내 글의 대상이 되는 건 결코 아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이야기들만 기록해놓기 때문이다. 


택시기사인 K 그리고 비디오 예술가인 C는 형제 사이다. 이 두 형제를 동시에 파고든 여인 하나가 있었다. 세연이라 불리는 여성이었다. 늘 추파춥스를 입에 물고 있던 팜므파탈 같은 고혹적인 이미지를 풍기던 그녀는 나로 하여금 클림트의 그림인 '유디트'의 이미지를 단박에 떠올리게 하던 인물이다. 이후로 그녀는 자연스레 유디트가 됐다. 물론 유디트는 나의 의뢰인이기도 하다. 평소 북극에 가고 싶다던 그녀는 폭설이 내리던 어느 날 C에게 무작정 주문진으로 가자고 청하고, 그날의 여행은 그렇게 급작스레 결정되는데...



이 소설의 화자는 자살도우미인 '나'다. 소설속 '나'가 직접 쓴 의뢰인의 이야기를 그의 시선과 시점으로 독자가 읽게 되는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가 글로 남겨놓은 의뢰인은 유디트와 미미 등 모두 두 명이며, 이들을 둘러싼 이야기가 각각 '유디트' '미미'라는 소제목으로 각 장에 실려 있으며, 그 밖에 유디트와의 계약이 성사된 뒤 비엔나로 떠나 그 곳에서 인연을 맺게 된 홍콩 여인과의 에피소드가 '에비앙'이라는 장에 실려 있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1990년대를 가리킨다. 택시기사 K가 운행하던 차량은 80년대와 90년대를 풍미하던 현대자동차의 중형차 시리즈 스텔라다. 스텔라는 포니에 이은 현대자동차의 두 번째 자체 모델이다. 대한민국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상징하는 차종이다. K는 94년형 스텔라TX를 도로 위에 올린 뒤 이른바 총알택시로 돌변하곤 한다. 소설에는 90년대 말 세기말적 분위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당시는 초고속 압축 성장을 이룬 대한민국 경제가 탄탄대로를 걷고 있던 시기이다. 



K가 우리나라 두 번째 고유모델 차량 스텔라를 이용, 시속 200킬로미터에 가까운 속력으로 도로를 질주하던 행위는 흡사 고도 성장으로 내달리던 우리 경제의 민첩성과 순발력을 상징하는 듯싶다. 하지만 시속 200킬로미터의 속력으로 질주하던 K의 스텔라가 목적지의 끝이 어디쯤일지 가늠할 수 없었듯이 우리 경제 역시 버블을 더욱 부풀리며 맹렬히 타오르던 시기이기도 하다. 


음침함을 연상시키는 죽음을 소재로 한 소설이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의외로 어둡지 않다. 오히려 세계적인 명화 몇 점을 매개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며 몽환적인 분위기마저 자아내게 한다. 다비드의 작품 '마라의 죽음'에 비친 누군가의 죽음은 편안함으로 다가온다. 형제인 K 그리고 C와 동시에 인연을 맺은 세연은 세기말적 관능미가 느껴지는 여성으로서 '나'로 하여금 단번에 클림트의 유디트를 떠올리게 했던 인물이다. 클림트의 '유디트'는 입을 반쯤 벌린 고혹적인 눈매의 여성으로 묘사돼 있다. 퇴폐미가 느껴지며 그래서 팜므파탈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보석으로 장식된 목은 죽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퇴폐적인 관능미와 죽음이라는 이미지가 동시에 느껴지는 묘한 그림이다.  



죽음의 암시는 첫 장 '마라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장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의 죽음'에 이르며 절정에 다다른다. 누군가는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건 우리 스스로의 의지에 의한 결과물이 아닌 까닭에 적어도 죽음만큼은 스스로에게 결정할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 책의 제목처럼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혹자는 지나치게 죽음을 미화한 게 아니냐며 불편한 속내를 내비치기도 한다. 


이러한 논란은 차치하고 이 소설이 쓰여지던 당시는 우리 경제가 고도성장의 끝자락에 닿아 버블이 곧 붕괴될 위태위태한 상황이었으며, 세기말적 분위기가 사회 전반을 관통하던 시기였다. 그 형체조차 알 수 없던 '밀레니엄 버그'라는 모호한 존재가 전 인류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듯이 어디를 향해 튈지 그 방향성을 전혀 짐작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반대로 우리들의 삶을 더 없이 무료하게 만들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이러한 분위기가 죽음이라는 대상으로 형상화된 게 아닐까 싶다. 


20년 전에 쓰인 소설 치고는 상당히 스타일리시한 데다가 몽환적인 분위기마저 물씬 풍긴다. 작가의 첫 장편이라고 하는데, 당시 제1회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다.



저자  김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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