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소녀들의 눈물이 바로 미투 운동의 원조 '눈길'

새 날 2018. 3. 9. 21:35
반응형

1944년 일제 강점기, 같은 마을에 사는 종분(김향기)과 영애(김새론)는 동갑내기 친구다. 하지만 가정 환경은 완전히 딴판이었다. 부잣집 막내 딸로 태어나 누릴 것 다 누리며 사는 영애에 비해 종분은 가뜩이나 없는 집안 형편에 그마저도 남동생인 종길에게 모든 걸 양보해야 하는 처지였다. 종분은 학교도 다닐 형편이 못돼 글조차 깨우치지 못했다. 때문에 모직 코트를 멋지게 차려 입은 채 구두를 신고 학교에 다니는 영애가 마냥 부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영애네 집에 일본 순사들이 들이닥치더니 집안을 온통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뒤 오빠인 영주(서영주)를 잡아간다. 영애 역시 같은 이유로 학교 등에서 갖은 모욕을 당하지만, 일본으로의 유학 기회를 얻기 위해 이를 악물고 이를 견뎌낸다.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된 영애가 부러웠던 종분은 엄마(장영남)에게 자신도 일본에 가고 싶다며 떼를 써보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욕만 돌아오기 일쑤다. 



한편, 종분 엄마가 장에 나가 이것 저것 내다 팔기 위해 밤새 집을 비운 사이 일본군이 들이닥쳐 종분을 다짜고짜 어디론가 납치해간다. 영문도 모른 채 만주로 향하는 열차에 강제로 태워진 종분, 이 곳에는 그녀 외에도 많은 조선 여성들이 있었으며, 놀랍게도 영애도 포함돼 있었다. 일본으로의 유학길에 오른 영애였으나 결과는 전혀 엉뚱한 방향이었다. 무언가 잘못돼도 한참이나 잘못된 셈이다. 이윽고 긴 운행 끝에 열차는 목적지에 도착하는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소재로 한 영화로, 37회 반프 월드 미디어 페스티벌 최우수상, 제24회 중국 금계백화장 최우수 작품상 및 여우주연상, 제67회 이탈리아상 등을 수상했다. 아울러 제16회 전주국제영화제, 제18회 상하이국제영화제, 제18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초청되는 등 전 세계로부터 작품성도 인정 받았다. 영화는 어느덧 백발성성 노파가 된 종분(김영옥)과 그녀의 옆집에 몰래 들락거리며 비행을 일삼던 가출소녀 은수(조수향)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에피소드, 그리고 차마 입 밖으로 끄집어낼 수 없을 만큼 끔찍했던 과거 종분과 영애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뒤 겪게 되는 고초 등이 교차로 편집되어 화면에 뿌려진다. 



같은 마을에서 살고 있을 때에는 가정 형편의 차이로 가깝게 지내기 어려웠던 종분과 영애, 특히 영애의 자존심은 하늘을 찌르는 형국이었다,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수용소로 끌려온 뒤 겪게 되는 모진 고초는 서로에게 기대며 의지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처지로 소녀들을 내몬다. 종분과 영애의 성격은 수용소에서도 확연히 다른 방향으로 드러난다. 종분은 어떡하든 살아서 나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수용소의 분위기에 순응하려 노력했고, 영애는 독립운동가인 아버지의 영향 탓인지 종분과는 반대로 대쪽 같이 꼿꼿하기만 했다. 그로 인해 더욱 심한 고초를 겪게 되는 영애다.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한 제대로 된 고증을 거쳐 소품 및 의상부터 각종 사건까지 모든 영역을 과장됨 없이 비극적인 영상으로 철저히 묘사한들 소녀들이 먼 이국 땅에서 실제로 겪었을 고통과 아픔을 우리가 헤아린다는 건 어쩌면 주제 넘는 행위일지 모른다. 그만큼 참혹하고 끔찍한 처지로 내몰린 소녀들이었다.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지옥이 따로 없었으며, 소녀들이 힘겹게 걷던 하얀 눈길은 엄마가 방안에 펼쳐놓은 목화솜처럼 포근해 보이지만, 실상은 덧대어놓아 켜켜이 쌓인, 끝없이 펼쳐진 고통에 다름 아니다. 



가정에서 보살핌을 받지 못한 데다가 학교에서 조차 외면 받아 결국 가출한 소녀 은수는 어른들의 보호 없이 거리로 뛰쳐나간 뒤 툭하면 일탈 행위를 벌이곤 한다. 어른들은 그런 소녀를 보듬어주기는커녕 되레 욕구 충족의 대상으로 삼기 일쑤다. 이렇듯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못돼먹은 어른들 천지다. 종분은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갈 당시와 비슷한 연령대인 은수가 안쓰러웠는지 자꾸만 눈에 밟힌다. 



분명히 가해자가 잘못했음에도 되레 피해자가 잘못한 것으로 몰아가는 건 일본이나 어른들이나 매한가지였다. 이런 상황이라면 피해자로서 오히려 숨죽여 살아야 했던 종분이 충분히 역정을 낼 법도 하다. 



얼마 전부터 미국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리기 위한 '위안부정의연대'가 만들어져 활동 중이다. 마치 영화속 종분이 영애를 떠올리며 "난 한 번도 혼자라 생각해본 적 없다"고 말했던 것처럼 피해를 당한 전 세계 여성들이 침묵을 깨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연대에 나선 것이다. 해당 모임은 “여성들이 피해자들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것을 말하고 연대하게 했다. 성폭력을 당해도 피해자가 잘못한 것처럼 여기던 인식을 바꾸고 여성이 이용 가능한 물건이 아닌 온전한 인격체임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며 현재 우리 사회를 들끓게 하고 있는 미투 운동과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의 공통점을 언급하고 나선 것이다. 


그렇다.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오늘날 미투 운동의 원조는 어쩌면 일본군 위안부로 고초를 당해야 했던 당시 소녀들, 그러니까 또 다른 종분 영애로 불리는 우리의 할머니들이 아닐까 싶다.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연대에 나선 모든 이들을 존경하고 응원한다. 



감독  이나정


* 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