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미투 운동으로 더욱 의미있게 다가오는 영화 '아티스트: 다시 태어나다'

새 날 2018. 3. 5.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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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젤(류현경)은 덴마크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여류 화가다. 하지만 그림에 문외한인 내가 보더라도 유럽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사실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어찌 보면 똘기 충만한 그녀의 평소 행동과 걸맞은 결과물일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지젤은 학업을 무사히 마쳤고, 덕분에 국내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동안 자신이 그린 작품들을 평가 받고 싶어 하는 그녀다. 


갤러리 등에 작품 전시를 의뢰한다. 그러나 그녀를 반겨하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다. 모두 거절 당하고 만다. 미술계를 쥐락펴락하는 기라성 같은 기존 작가들에 비하면 지젤은 대중적인 인지도가 형편 없이 낮은, 아주 보잘 것 없는 햇병아리 아티스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무언가 일을 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입시를 앞둔 한 학생의 미술 과외 지도를 맡게 된 지젤이다. 



그런데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졌다. 과외를 맡은 아이의 어머니가 박재범(박정민)이라 불리는 갤러리 대표와 친분이 있었는데, 덕분에 지젤의 그림이 그의 눈도장을 찍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하여 지젤은 첫 전시회를 무사히 개최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미술계로부터 주목을 받으며 화려하게 자신의 꿈을 펼치려던 찰나, 지젤은 급성심근경색으로 그만 사망하고 마는데...



지젤은 예술가란 모름지기 세상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은 이미 각박해질 대로 각박해져 진짜 예술가는 씨가 말라버렸고, 결국 남은 건 장사꾼과 사기꾼, 그리고 쓰레기들과 양아치들밖에 없단다. 그녀는 비록 자신의 그림이 인정 받지 못할지언정 어느 누구에게도, 심지어 미술계의 거장이라며 주변 사람들로부터 추앙받고 있는 인물 앞에서 조차 절대로 기가 죽지 않을 정도로 패기 하나만큼은 대단했다. 가진 건 쥐뿔도 없으며 때로는 기행을 일삼기도 하지만, 예술을 향한 자신의 소신과 가치관만큼은 꿋꿋하게 지켜내려던 인물이다. 



지젤을 화려하게 미술계에 등단시키며 그녀를 일약 스타 아티스트로 떠오르게 만든 갤러리 대표 박재범은 미술계와 갤러리의 이단아라 불릴 만큼 고집스러우면서도 지젤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의 예술에 대한 철학과 가치관이 뚜렷한 인물이다. 더구나 다른 갤러리의 대표들과는 달리 나이도 무척 젊다. 그림을 보는 안목이 어느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인물이다.



영화는 매우 이질적이면서도 묘한 공통점을 지닌 두 사람의 운명적인 만남과 이로부터 비롯되는 아슬아슬한 에피소드, 그리고 이를 통해 예술 및 예술가에 대한 시각을 환기시키고 있다. 지젤은 아티스트라면 으레 지니고 있을 법한 똘기 가득하고, 평소 기행을 일삼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어쩌면 우리가 평소 생각해온 전형적인 예술가 타입일지도 모른다.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일정 정도의 패기는 필요악이며, 왠지 4차원적인 사고와 행동 또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곤 한다. 평범한 이들이 볼 때 소위 예술가들은 자신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비범한 까닭에 이들의 막돼먹은(?) 행동에도 비교적 너그러운 편이다. 지젤이 그린 작품은 박재범이 대표로 있는 갤러리 외에는 그 어느 곳에서도 환대받지 못한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 지젤 스스로는 예술계가 썩어 문드러졌으며, 덕분에 온통 사기꾼과 장사꾼들만 득시글거려 진짜 예술이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일갈한다. 



그러던 와중에 박재범을 만나 첫 전시회를 성공리에 마쳤다. 박재범은 예술이란 모름지기 대중의 인기와 부합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객관적으로 아무리 뛰어난 작품이라고 해도 이는 예술일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물을 발굴, 이를 띄우고 대중적인 인지도를 높여 미술계에서 입지를 굳히려 하고 있으며, 지젤의 전시회는 그의 일환이었다. 



그는 그림에 대해 남들과는 다른, 아주 독특한 안목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가 지향하는 예술은 지젤이 생각하던 것과는 정반대의 개념과 가치관을 지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지젤이 평소 가장 경멸해오던 장사꾼, 사기꾼 혹은 양아치의 부류가 다름 아닌 박재범 같은 인물이 아닐까 싶다. 서로 지향하는 바가 전혀 다른 인물들끼리 그림을 매개로 각기 다른 목적으로 만나 동상이몽을 꿈꾸는 모습은 어이없으면서도 흥미를 자아낸다.  



이 작품과는 전혀 별개의 사안이나 요즘 문화예술계가 미투 운동으로 온통 벌집을 쑤셔놓은 듯 연일 시끄럽다. 혹자는 이쪽 업계에 몸담고 있는, 이른바 예술가라 불리는 사람들이, 지젤이 그러했듯 똘기 충만하고 기행을 일삼아도 예술이라는 미명 하에 이를 너그럽게 덮어주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는데, 이성에 대한 성적 희롱이나 추행 등도 그와 비슷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고, 또한 모두가 이를 묵인해온 덕분에 오늘날의 사단으로 불거진 게 아닐까 하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세상을 보다 풍요롭게 하기 위한 것이라며, 그동안 자신들의 행위를 두둔하기 바빴고 그럴 듯하게 포장해왔으나 사실은 아주 파렴치한 범죄 행위에 다름 아니었던 셈이다. 이는 지젤의 그림을 위대한 아티스트의 작품으로 위장하고 있으나, 본질은 그와 전혀 달랐던 사실과 비슷한 맥락이다. 예술 및 아티스트가 지녀야 할 덕목을 공통분모와 접점이라고는 일절 없을 것 같은 두 사람 사이의 에피소드에 적절히 녹여 블랙코미디 형식으로 연출한 작품이다. 두 주연 배우의 연기가 매우 인상적이다. 미투 운동으로 문화예술계가 새로운 변화를 요구 받고 있는 시점이기에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영화다. 



감독  김경원


* 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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