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저냥

임산부석, 작은 배려가 아쉽다

새 날 2017. 11. 2.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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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한 몸을 이끌고 전철에 올랐다. 퇴근 무렵 시각이니 피곤한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을 테다. 전철에 몸을 실은 이들의 표정으로부터는 고단함이 역력했다. 몸 곳곳에서 이의 흔적이 묻어나온다. 자리에 앉은 이들은 곧바로 잠에 빠져들기 일쑤였고, 선 채로 목적지로 향하는 이들 역시 피곤한 듯 양쪽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때였다. 좌석 중간에 앉아 있던 한 젊은 여성이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하차하면서 자신의 자리를 다른 여성에게 양보하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끼리 자리를 양보하는 광경은 무언가 생경하게 다가오는 탓에 난 이를 좀 더 유심히 관찰했다. 자리를 양보 받아 좌석에 앉은 젊은 여성의 상의에는 분홍색의 큼지막한 표식 하나가 달려 있었다. 다름 아닌 임산부 배지였다. 


임산부 배지


주변을 살폈다. 좌석 양쪽 끝으로 임산부 배려석이 있었건만, 정작 엉뚱한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바람에 마땅히 배려를 받아야 할 사람이 어쩔 줄을 몰라해 하고 있던 상황이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임산부 배려석이 아닌 일반 좌석에 앉아 있던 승객이 임산부 배지를 확인하고 바로 자리를 양보해주었다는 점이다. 


임산부를 배려하자는 취지로 도입된 서울 지하철의 임산부 배려석은 행정 당국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임산부가 언제든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놓자는 취지가 무색하게 임산부와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들이 얼씨구나 하며 앉아 있기 일쑤이다. 해당 제도의 운영을 모르고 하는 행위라면 그나마 다행일 테다. 이를 뻔히 알면서도 임산부 배려석에 앉는 얌체족이 실은 태반이다. 


앉아 있다가 임산부가 나타날 경우 자리를 양보해주면 그만이지 않느냐며 항변하는 사람들도 더러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상은 임산부가 임산부 배지를 달고 임산부 배려석 앞에 서 있어도 이런 부류의 사람들 대개는 모른 척하기 바쁘다. 왜냐하면 임산부 배지를 인지한 뒤 자리를 양보할 만큼의 배려심을 이미 갖춘 사람이라면 애시당초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있을 일은 추호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인터넷 커뮤니티 등 일각에서는 임신을 하지 않았으면서도 임산부 배지를 받았다는 인증 사진이 돌아다니거나 임산부 배지와 유사한 가짜 배지가 시중에서 유료로 판매되고 있다며 해당 제도를 불신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무작정 임산부 배려석을 비워놓는 건 이를 악용하는 사람들만 도와주는 꼴이라며 이를 극구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물론 그들의 주장처럼 해당 제도를 악용하는 이들이 일부 존재할 수는 있다. 하지만 구더기 무서워 장 담그는 일을 멈출 수 없듯이 일부 몰지각한 이들 때문에 배려 받아 마땅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 자체를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다. 현재는 행정 당국인들 뾰족한 수가 없어 보인다. 그들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객차내 방송을 통해 제도의 취지를 안내하고, 캠페인을 벌여 지속적으로 시민들의 의식 전환을 꾀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하지만 이러한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산부 배려석의 지위는 갈수록 위태롭기만 하다. 시민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르쇠로 일관한 채 일단 자리에 앉고 본다. 이런 상황에서 미래의 주인공을 위해 배려해 달라는 하소연은 '쇠귀에 경 읽기'에 불과할 뿐이다. 작은 배려조차 베풀 줄을 모를 만큼 각박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발적인 행위를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이 아닐까 싶다.


ⓒ연합뉴스


근자엔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이뤄지지 않고 이렇듯 임산부 배려석이 무용지물이 되다시피 하면서 해당 제도의 무용론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있다. 이를 둘러싸고 세대 간 갈등이 불거지는 등 오히려 하지 않음만 못하다는 여론마저 형성되고 있다. 심지어 이러한 현상이 안타까운 나머지 어떤 이들은 거꾸로 임산부에게 언제든 자리를 양보해주겠노라는 배지를 달아 임산부가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역제안을 하기도 한다. 


이는 곧 어떤 방식이 됐든 작금의 임산부석 제도에 메스를 가해야 할 시점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분명한 건 지금처럼 유명무실한 데다가 갈등의 인자 역할을 지속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불편을 줄이고 모두를 이롭게 하고자 도입된 제도이건만, 되레 갈등을 키운다는 건 사회 구성원 모두를 곤경에 빠트리는 결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임산부에 대한 배려를 멈출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자발적인 배려를 바라기에는 시민의식이 지나치게 얕을 뿐이고, 결국 자발이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건 강요밖에 더 있겠는가. 작은 배려가 너무도 아쉬운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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