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태극기와 삼일절의 의미를 더럽히지 말라

새 날 2017. 2. 26.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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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는 23일 대변인의 정례브리핑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이 일본의 외교공관 앞에 설치된 사실과 관련하여 "외교공관 앞에 어떤 조형물이 설치되는 것은 외교공관의 보호와 관련된 국제예양 및 관행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이라고 밝히면서 부산 주재 일본 총영사관 앞에 설치된 소녀상뿐 아니라 서울 대사관 근처의 소녀상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2015년 12월 28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와 관련하여 한국과 일본 양국 정부는 이른바 '최종적이면서 불가역적'인 합의를 타결시킨 바 있다. 당시 위안부 할머니들은 어처구니없는 협상 결과에 몸둘 바를 모른 채 조용히 눈물만 훔쳐야 했다. 이후 굴욕적인 협상 타결은 원천무효이며 재협상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전국에서 들끓었으며, 일본은 진심 어린 사죄 없이 단돈 10억 엔으로 할머니들의 명예마저 더럽히는 망동을 일삼고 만다. 서두에서 언급한 외교부의 브리핑 상황은 그의 연장선이다. 


ⓒSBS


하지만 이 대목에서 우리가 분노하는 건 비단 일본 정부의 뻔뻔하기 짝이없는 태도 때문만은 아니다. 다름아닌 국민의 정서와 여론 그리고 피해 당사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의 의사에는 아랑곳없이 이렇듯 일방적인 합의를 이끌어낸 박근혜 정부의 무능하기 이를 데 없는 실정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비선실세 일당은 위안부 협상 졸속 타결로 국민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은 것도 모자라 위임 받은 권력을 오남용, 국정농단을 일삼아오더니 결국 취임 4년만에 탄핵이라는 최대 위기 국면으로 내몰렸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어느 모로 보나 탄핵되어야 마땅한 세력을 옹호하는 집단이 최근 태극기를 든 채 광장으로 일제히 쏟아져나오고 있다. 더욱 아이러니한 건 태극기를 든 그들 스스로가 애국자임을 자처하고 나섰다는 대목이다. 이들은 헌재의 탄핵 심판이 임박하자 동원 가능한 모든 세력을 규합, 에너지를 한 곳으로 집중시키고 있는 와중이다. 탄핵을 찬성하는 촛불과 탄핵을 반대하는 태극기가 어느덧 이념과 세대 간 갈등 양상을 보이면서 일촉즉발의 분위기로 치닫고 있는 형국이다. 


이는 단순한 갈등 수준을 넘어선다. 어느덧 과격 양상으로 흐르고 있다. 헌재의 탄핵안 인용이 가시권으로 들어오자 최근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을 살해하겠노라는 협박성 글이 인터넷에 올라오면서 밀착 경호에 들어갔다. 이들은 박영수 특별검사를 향한 협박도 서슴지 않는다. "대한민국을 바로 지키려고 저 박영수 특검의 목을 날리려고 온 거 아닙니까. 우리의 목적은 박영수를 때려잡는 겁니다" 한 박사모 회원의 일성이다. 이렇듯 친박 단체들의 위협 수위가 높아지면서 박영수 특검 등에 대한 신변 보호도 요청된 상황이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를 향한 테러 첩보도 접수돼 경찰이 신변보호를 강화했다.



박사모를 비롯한 이른바 친박 단체의 최근 움직임은 단순한 탄핵 반대로 그치는 게 아닌, 만약 탄핵안이 인용될 경우 헌재 결정에 불복하겠다는 뜻도 내비쳤다. 더불어 극단적인 행동을 예고하는 협박성 발언도 거듭 언급되고 있다. 온라인상에서 오가는 말들은 더욱 살벌하다. 자칭 보수라 일컫는 커뮤니티에는 “탄핵 인용은 정권 찬탈 행위이므로 계엄령이 선포돼야 한다”거나 “피로써 애국열사가 되겠다”, “탄핵이 인용되면 전시 상황이 될 것이다” 와 같은 섬뜩한 글들로 도배되다시피 하고 있다. 심지어 ‘청년 암살단’이니 ‘할복단’을 모집한다는 글들도 심심찮게 올라온다. 


이들이 극단적인 행위를 일삼으려 하거나 과격한 언사를 내뱉고 있는 대목은 일견 이해된다. 헌재의 탄핵 심판이 시시각각 다가오면서 자신들이 우상처럼 떠받들어오던 인물과 시대가 함께 부정됨과 동시에 몰락을 앞두고 있으니 얼마나 초조하겠는가. 어찌 보면 정말로 안쓰럽다. 하지만 이들이 손에 쥐고 흔드는 태극기만큼은 절대로 양보할 만한 사안이 아니다. 이들의 한결 같은 주장은 태극기로 대한민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자는 것이다. 물론 이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범죄자를 옹호하는 게 어찌하여 대한민국과 민주주의를 지키는 행위인가. 특히 삼일절인 3월 1일에는 집회 참가자 500만 명을 목표로 대규모 집회를 예고하고 나섰다. 서울 도심 일대 전역이 태극기 물결로 가득차는 대한민국 초유의 기적을 일궈내겠노라는 야심찬 계획이다. 


그러나 태극기라고 하여 모두가 같다고 볼 수는 없다. 우리 마음 속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태극기와 관련한 정서는 현재 광장을 뒤덮은 그것과는 판이하기 때문이다. 일제에 항거하여 태극기를 흔들던 삼일절 당시의 태극기와 오늘날 광장을 뒤덮은 태극기의 물결은 너무도 극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아니 비교 자체가 될 수 없는 사안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박근혜 정부는 전범국인 일본과의 위안부 협상을 통해 국민의 의사에 반하여 자존심마저 짓밟는 굴욕적인 타결을 이룬 바 있다. 


ⓒ연합뉴스


대부분의 국민들은 위안부 협상 타결은 잘못된 것이고, 소녀상의 이전은 절대로 있을 수 없으며, 이번 협상을 원천무효화하여 재협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과 주의 주장이야말로 1919년 3월 1일 대한민국 광장 전역을 뒤덮었던,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 만방에 알린 장엄한 태극기의 물결과 동일한 시대정신을 이루며 궤를 함께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역으로 박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하면서 현재 광장을 뒤덮고 있는 태극기의 물결은 외교부 대변인의 브리핑 내용처럼 결국 일본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고 나서거나 피해자를 졸지에 가해자로 둔갑시키고 있는 셈이기에 삼일절의 태극기와는 절대로 동일선상에 같이 놓일 수가 없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오남용해왔듯, 태극기마저 원래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오남용되고 있는 작금의 현실과 같은 맥락이다. 광장의 친박 세력은 더 이상 태극기와 삼일절의 의미를 더럽히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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