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훈훈한 추석 미담의 이면, 외면할 수 없는 불편한 현실

새 날 2016. 9. 18.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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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명절에 올라온 미담 하나가 새삼 화제다. 할머니께서 위독하다고 하여 청원휴가를 낸 군인이 목적지로 가는 버스표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찰나, 한 버스 기사가 승객들의 양해를 구한 뒤 그를 자신이 운행하는 버스의 보조 좌석에 앉혀 갈 수 있게 배려했다는, 무척 훈훈한 사연이다. 어렵사리 목적지에 도착한 군인은 고마운 마음에 버스요금이라며 만원 짜리 2장을 건넸으나 기사는 한사코 이를 사양했다고 한다. 


이날 기사가 운전한 차량의 운행기록이 해당 사연과 함께 온라인에 공개됐다. 기사는 이날 총 12시간 51분 동안을 운행했다. 물론 명절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기사는 이날 꽤 장시간을 자동차 안에서 꼼짝없이 버텨 온 셈이다. 해당 기사 말미에는 기사에게 상을 주어야 한다거나 칭찬해 주어야 한다는 네티즌들의 댓글이 쇄도하고 있다. 하지만 내겐 훈훈함보다는 왠지 안타깝고 씁쓸한 느낌이 앞선다. 미담도 미담이지만 운행기록이 더욱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불과 2개월 전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국민일보


7월 17일 영동고속도로에서 있었던 끔찍한 사고다. 당시 관광버스가 졸음 운전 끝에 정차해 있던 승용차를 들이받으며 5중 추돌사고로 이어져 여행 중이던 20대 여성 4명이 숨지는 등 총 41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얼마후 사고 동영상이 일반에 공개되었고, 관광버스 기사가 당시 졸음운전을 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버스 등 대형차량의 운행 관행에 대한 규제의 목소리가 비등해졌다. 이에 정부는 4시간 운전하고 30분 쉬는 것을 의무화하는 등의 관련 대책을 내놓는다. 하지만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왜냐하면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사용자는 근로시간이 4시간인 경우 30분 이상, 8시간인 경우 1시간 이상의 휴게시간을 근로시간 도중에 주어야 한다고 이미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즉, 이번에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그다지 새삼스럽지 않다는 의미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이 조항이 잘 지켜지지 않아 이를 강제로라도 의무화하겠다는 게 정부의 방침일 테고, 이렇게 하여 잘 지켜진다면 그나마 다행인 것만은 틀림없다. 다만, 정부가 정작 손을 봐야 하는 건 보다 근원적인 부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국회도서관이 지난달 발표한 '외국법률 이슈브리핑'에 따르면 해외 각국은 승합차 및 화물차 운전자의 일일 최대 운전시간뿐 아니라 운전 중 휴게시간, 일일 휴식시간, 총 근로시간 역시 법에서 명시적으로 규제하고 있다. 영국은 근무일에 10시간을 초과해 운전할 수 없도록 했다. 5시간30분 근로 시 최소 30분씩 쉬도록 하며, 예외가 적용되지 않는 한 근무일에 근로시간이 하루 11시간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 일일 휴식시간은 최소 11시간이며, 주당 총 근로시간은 60시간을 넘어선 안 된다.

 

미국도 상업용 화물차 운전자의 경우 연속 10시간 휴식 후 총 14시간 이내에 운전 및 휴게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이 14시간 중 실제 운전시간은 11시간으로 제한한다. 그리고 8시간 운전 후에는 30분씩 휴게시간을 갖는다. 승합차와 화물차 모두 총 근로시간은 연속 7일에 최대 60시간, 연속 8일에 최대 70시간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어떨까?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1주 간의 근로시간은 40시간을 초과할 수 없으며, 1일의 근로시간은 휴게시간을 제외하고 8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 물론 근로자 당사자와 합의할 경우 1주에 최장 12시간의 연장근로가 가능하긴 하다. 그러나 운수업처럼 공중의 편의를 위한 사업은 별도의 특례 조항을 두어 사용자와 근로자대표가 서면 합의할 경우 주 12시간을 초과하는 연장근로가 얼마든 가능하다. 


인터넷 관련 기사 캡쳐


이 운수업에는 항공, 선박, 철도와 같은 특수 영역뿐 아니라 일상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버스나 화물차 등도 포함되는 굉장히 포괄적인 업종이다. 즉, 우리의 경우 안타깝게도 앞서 사례로 든 선진국들처럼 버스 등 대형 화물차량의 운행을 운수업에서 별도로 떼어내어 운전시간 이외에 일정한 휴식시간까지 확보하도록 하는 구체적인 근로조건을 명시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비단 명절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하루 12시간 이상의 장시간 운행은 그냥 통상적이고, 심지어 17-18시간 이상의 운행마저 강행하게 하고 있다. 이렇듯 열악한 근로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이 모두는 합법이다.


그렇다면 정부가 내놓은 대책만으로는 앞으로 영동고속도로에서 빚어진 대형 졸음운전사고와 같은 사례가 또 다시 발생하지 말란 법이 없다. 재난 등 안전과 관련하여 소잃고 외양간이라도 고치면 성공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만연하고 있는 게 현재 우리 사회의 참모습일 테다. 정부가 대형버스나 화물차로 인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려면 다름아닌 버스나 대형화물차 근로자들의 근로기준부터 새로이 정해야 제대로 된 수순이 아닐까 싶다. 하루 12시간 이상이 찍힌 운행기록계는 결코 자랑이 되어서도, 훈훈한 미담의 사연으로 둔갑되어서도 안 된다. 이는 불법행위이며 때문에 누구든 당장 개선을 요구해야 하는 올곧은 사회적 토대가 마련되어야 비로소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제대로 담보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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