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부적절한 어휘 선택, 어떻게 갈등을 야기하나

새 날 2015. 11. 12.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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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다수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끝내 강행했던 건 순전히 작금의 역사 교과서가 '잘못된 역사 교과서'라는 논리를 그 근거로 삼고 있다. 심지어 "잘못된 역사를 배우면 혼이 없는 인간이 되거나,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발언마저 서슴지 않고 있는 건 대통령의 사상과 이념의 편향성을 미루어 짐작케 하고도 남는 사례라 할 만하다.

 

대통령은 국정화 체제에 의해 발행된 역사 교과서만이 '올바른 역사 교과서'라 말하며, 이를 통해 국정화의 당위성을 재차 강조하고 나섰다. 온라인에선 '혼이 비정상'이라는 대통령의 발언이 알려지자 각종 패러디물이 난무하는 등 비아냥 일색의 뜨거운 반응이 쏟아지고 있는 양상이다. 이쯤되면 유명 아이돌의 인기가 부럽지 않을 정도다. 물론 대통령의 발언이 우리의 상식을 깰 만큼 당혹스럽게 만드는 경우가 간혹 있긴 했던 것 같다. 얼마 전 역사교과서가 좌편향됐다며 "전체 책을 다 보면 그런 기운이 온다"고 했던 발언이 네티즌들 사이에서 유행어가 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프레시안

 

보통사람으로선 받아들이기 다소 난해한(?) 용어가 사용된다거나 가끔 듣기 거북하고 이해 불가한 발언을 늘어놓곤 했던 터라 이왕이면 정제된 언어가 쓰였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러한 결과는 사람마다 얼굴 생김새나 성격이 모두 판이한 것과 같이 각기 다른 언어적 습성으로 인한 결과로 판단되기에 다른 이들이 비아냥거린다고 하여 나마저 이에 대해 태클을 걸고 싶은 생각은 사실 추호도 없다. 다만, 씁쓸하게 와닿는 한 가지는 어쩔 수가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11일 국무회의에서 "앞으로 국민을 위해서 진실한 사람들만이 선택받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말해 또 다시 논란에 휩싸였다. 이에 대해 대통령이 야당뿐 아니라 여당 내 비박계까지 겨냥한 것이라는 등 해석이 분분하다. 코앞으로 다가 온 총선 개입설까지 대두되고 있는 양상이다. 일단 발언의 진의에 대한 판단은 뒤로 미루도록 하자. 내가 언급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난 근래 대통령이 흔히 활용해 오고 있는 '올바른', '잘못된', '비정상', '진실한' 따위의 단어들이 왠지 혼란스럽거나 생경하게 다가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우선 이들 단어에 대한 사전적 의미부터 살펴 볼까?

 

올바르다 : 말이나 생각, 행동 따위가 이치나 규범에서 벗어남이 없이 옳고 바르다

잘못되다 : 나쁜 길로 빠지다

비정상 : 정상이 아님

정상 : 특별한 변동이나 탈이 없이 제대로인 상태, 있어야 할 상태에 바로 있는 것

진실 : 거짓이 없는 사실, 마음에 거짓이 없이 순수하고 바름



해당 어휘들이 지닌 의미는 더 이상의 군더더기가 없을 정도로 간결하다. 평소 알고 있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대통령이 이러한 류의 어휘들을 사용해 온 뒤로는 그의 활용이 내심 꺼림직스럽거나 고민스럽게 다가온다. 그도 그럴 것이 대통령이 근래 사용한 단어들은 일종의 가치판단 범주에 해당하는 어휘들인 탓이다. 즉 가치관과 잣대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판단 결과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는 한 마디로 옳고 그름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이란 있을 수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우리나라의 역사학을 다루는 학계에서는 현재의 역사 교과서를 지극히 정상적이거나 올바른 교과서로 보고 있지만, 대통령은 이를 두고 잘못됐다거나 비정상적인 교과서라 지칭하고 있는 경우와 같다. 마치 우리가 일상에서 '틀림'과 '다름'이라는 어휘를 혼용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대통령의 이 한 마디로 인해 현재의 역사 교과서로 배웠거나 배우고 있는 우리 아이들은 졸지에 모두 혼이 없거나 비정상적인 아이로 둔갑하고 말았다. 때문에 대통령의 이러한 류의 어휘 사용은 매우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오로지 대통령 자신의 잣대에 의한 생각과 사상만이 정상이고, 그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나 있는 사람들에 대해선 모두 그릇되거나 비정상적이라며 편을 가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진실한 사람을 선택해달라는 발언은 그러한 편 가르기 행태에 정점을 찍고 있는 모양새다. 과연 대통령에게 있어 진실한 사람이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의미에서의 그것과 같은 맥락이라 말할 수 있을까? 대통령의 잣대에 걸맞는 진실한 사람이란, 물론 미사여구로 감춰져 있겠으나, 오로지 야당이 아닌 여당이어야 하고,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비박이 아닌 친박이어야 할 텐데?

 

ⓒ뉴스1

 

대통령은 국정최고책임자이자 행정부의 수반이다. 입법부가 만들어 놓은 법에 따라 이를 충실히 집행해야 하는 게 다름아닌 행정부의 역할이다. 아울러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의 3권분립은 헌법에도 규정되어 있는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에 해당한다. 하지만 대통령의 태도는 이러한 헌법마저도 초월한 위치에 올라 서있기라도 한듯 국민의 대표기관인 입법부를 쥐락펴락하고 있는 모양새다. 진실한 사람을 선택하라며 자신의 뜻에 반하는 국회의원들을 표로 응징해 달라고 압박을 가하는 건 입법부의 권한 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게 아니면 과연 무언가.

 

국민의 대표기관인 입법부를 무시하는 건 결국 국민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볼 수 있다. 친박과 비박을 가르건 말건 그건 집권세력 내 집안싸움이기에 나로선 전혀 관심 없는 사안이지만, 자신들의 집안싸움과 편 가르기마저도 왜 국민을 팔아야 하는가? 역사 교과서로 이 나라를 둘로 갈라놓은 것도 모자라 이젠 민생 및 선거를 빌미로 또 다시 갈라놓을 셈인가?  대통령의 부적절한 어휘 선택은 이렇듯 원래의 사전적 의미로서의 단어에 불분명하거나 불순한 이미지를 덧칠하고 있는 데다, 국민 전체를 이쪽 저쪽으로 편 가르기하며 갈등을 야기하고 있기에 더 없이 씁쓸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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