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친일인명사전의 중고교 비치를 환영하는 이유

새 날 2015. 11. 8.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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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과서에 대한 국정화가 확정된 이후 새 역사 교과서 집필진을 공모하는 등 국정 교과서 제작이 활기를 띠고 있다. 하지만 집필진 공개와 구성 여부 등을 놓고 벌써부터 곳곳에서 잡음이 이어지고 있고, 급기야 국정 교과서 대표집필자로 내정됐던 최몽룡 서울대 명예교수가 지난 4일 자택에서 기자들과 만나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 술을 마시며 여기자에게 부적절한 언행을 한 사실이 알려져 자질 논란에 휩싸인 끝에 결국 자진 사퇴하는 돌발 사태마저 빚어지고 말았다. 국정화의 험난한 행보를 예고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비가 오는 궂은 날씨 속에서도 국정화를 반대하는 측과 찬성하는 측의 집회 및 기자회견 등 장외에서의 치열한 여론전은 계속됐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저지 네트워크' 소속 회원들은 7일 오후 청계광장 앞에서 집회를 열고 국정 교과서 불복종 행동을 시민들과 함깨 해나가기로 하였으며, '국정교과서 반대 청소년행동' 역시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집회를 열고 교과서의 국정화 철회를 정부에 요구했다. 

 

ⓒ연합뉴스

 

자칭 애국보수단체들도 국정화 반대 움직임에 맞불을 놓고 있는 모양새다. '공교육살리기학부모연합'과 '애국단체총협의회' 회원들은 교과서 국정화를 지지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성명서를 발표하였으며, '재향경우회' 소속 회원들 또한 동화면세점 앞에서 집회를 열고 "교과서 국정화는 종북세력의 역사반란 진압을 위한 대한민국 보위조치이다. 올바른 역사 교과서를 환영한다"고 주장했다.

 

정치권도 잰걸음을 보이고 있다. 국회 복귀와 함께 교과서 투쟁을 장기적으로 이어갈 것을 선언한 새정치민주연합은 7일 농성을 해제하며 앞으로 국정 교과서 저지 입법 청원 운동 등을 지속해나갈 것을 천명하고, 당장 진행될 예산안 심사에서는 국정화 추진 관런 예산 삭감 요구를 통해 국정화 저지에 모든 당력을 집중시킬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런 가운데 서울시교육청이 서울 시내 모든 중고등학교에 친일인명사전 배포 사업을 추진하겠노라는 소식이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서울시의회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2015년도 서울시 교육비특별회계 예산안'을 통과시키고 서울 시내 모든 중고등학교에 친일인명사전을 배포하기로 한 바 있다. 하지만 사업은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해당 사전을 발간한 민족문제연구소가 좌편향적이고 진보성향으로 분류된다는 논리를 들고 나온 일부 학부모 및 보수단체 등의 반발과 함께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재판이 맞물린 탓이다.


이렇듯 뜻하지 않게 미뤄졌던 해당 사업이 국정화 확정 시점에 맞춰 재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서울시의회와 서울시교육청에 따르면 다음 달부터 서울 내 중고교 551개교에 친일인명사전을 배포하는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한다. 내년에는 초등학교 단위에도 비치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라 밝히고 있다.



친일인명사전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가 1994년부터 진행해 온 사전편찬 작업으로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지지 찬양하고, 일제 식민통치에 협력하여 한국의 독립을 방해하는 등 친일행위를 한 한국인의 목록을 분류 정리하여 2009년 11월 8일 출간한 인명사전이다. 총 3권, 3,000여 쪽에 달하는 친일인명사전은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1945년 8월 15일 해방될 때까지 일제식민통치와 전쟁에 협력한 4,389명의 주요 친일행각과 광복 이후의 행적 등을 담고 있다. (박문각 시사상식사전)

 

이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 장면 전 국무총리, 방응모 조선일보 전 사장, 음악가 안익태, 무용가 최승희, 홍난파, 언론인 장지연, 소설가 김동인 등 유력 인사들이 상당수가 수록돼 있고, 독립유공자로 지정됐던 인물 20명 가량도 포함돼 있다.

 

정부가 국정화를 확정한 이상 그 제작 과정이 비록 순탄치는 않을지언정 2017년에는 어떤 식으로든 국정 교과서가 선을 보일 테고, 우리 아이들이 이를 통해 학습하게 되리라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정부 등 집권세력이 국정화의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는 건, 다름아닌 '올바른 교과서'라는 개념인데, 이는 이념에 따라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객관적인 역사 교과서를 말한다. 물론 비단 역사 교과서가 아니더라도 교과서가 이념에 의해 어느 한 쪽 방향으로 치우쳐선 안 된다는 논리는 분명히 옳다. 하지만 보는 시각과 관점에 따라 해석이 극명해지고, 절대로 객관이란 개념이 성립될 수 없는 역사와 관련하여 지극히 보수 성향인 현 집권세력이 스스로 객관적이라며 내세우고 있는 '올바른'의 잣대가 과연 사전적인 의미로 봤을 때의 적절한 표현인가에 대해선 사실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다.

 

엄밀히 말해 여기서의 '올바른'이란 개념은 가치판단에 해당하는 영역이기에 잣대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얼마든 달라질 수 있고, 그 자체로 이미 지극히 주관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대통령은 국정 교과서로 ‘국민 통합’을 이루겠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 때문에 정작 우리 사회는 때아닌 이념 갈등을 일으키며 심각한 국론 분열 현상마저 빚어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집권세력이 내세우는 논리는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뉴시스

 

한편, 부끄러운 과거일수록 오히려 기억해야 하며, 이를 올바르게 교육해야만 불행했던 과거가 또 다시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만고불변의 진리일 테다. 어쩌면 이는 집권세력이 국정화의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는 '올바른'의 개념 내지 취지와도 꼭 맞아떨어지는 지점이 아닐까 싶다. 이와 관련하여 독일의 경우를 사례로 들어보자. 독일은 객관적인(?) 역사 기술을 위해 심지어 과거 서로 전쟁을 벌였던 이웃국가 프랑스, 폴란드 등과도 공동 집필을 실시하여 자신들의 잔혹했던 범죄 행각이 역사 교과서에 낱낱이 드러나도록 했다. 한 발 더 나아가 아이들의 산 교육을 위해 포로수용소 내지 홀로코스트 기념관 등지로의 수학여행을 교육 과정에 포함시키고 있기도 하다. 부끄러운 과거 역사를 통해 국민들이 책임감을 갖도록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로지 하나의 관점으로만 쓰인 교과서로 역사를 배워야 하는 우리의 암담한 현실, 얼마나 균형 잡힌 역사 교과서가 탄생하느냐가 이번 국정화 논란의 최대 핵심이자 관전 포인트가 될 텐데, 자칫 집권세력이 국정 편찬이라는 제도상의 이점을 이용하여 자신들과 직간접적으로 깊숙이 연루된 과거의 친일 행적과 독재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거나 날조 왜곡할 수도 있는 상황, 물론 나 개인적으로는 절대로 그러한 최악의 결과로 귀결되지 않기를 바라는 입장이지만, 때문에 중고등학교 친일인명사전 비치 사업은 앞으로 발간될 국정 교과서의 내용과는 별개로, 우리 아이들이 독일의 경우처럼 부끄러웠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여 당당하고 책임감 있는 국민으로 거듭날 수 있게 한다는 취지에서 볼 때 매우 바람직스럽게 다가온다. 이것이야말로 박근혜 대통령이 말하는 올바른 역사교육을 통해 아이들이 우리 역사를 바르게 인식하게 하는 첩경이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아울러 국정화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암울한 처지에서 그나마 그에 맞설 수 있는 많지 않은 합법적인 불복종 도구 중 하나이자 상징적인 사업이라는 측면에서도 친일인명사전의 중고등학교 비치를 적극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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