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국정화가 할퀴고 간 자리, 남은 건 갈등뿐

새 날 2015. 11. 4.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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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역사 교과서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대한 국정화가 확정됐다. 행정예고 기간이 끝나자마자 마치 번갯불에 콩 구워먹기라도 하듯 다음날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27일 시정연설을 통해 역사를 바로 잡는 것은 정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며 일찌감치 선을 그은 채 배수진을 치고 나온 덕분이라 국민들 사이에서 제아무리 반대 여론이 비등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는 별개로 국정화는 이미 시간 문제였을 뿐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져 오던 터다.

 

장관의 고시만으로 바꿀 수 있는 교과서 발행체제의 전환 절차는 비록 추진 과정에서의 무리수 때문에 많은 잡음을 빚어내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볼 때 국정화로 가는 길에 걸림돌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읽힌다. 국민 의견 따위와는 상관없이 오롯이 국정최고책임자의 의지에 달린 사안이었던 탓이다. 국민 다수가 국정화에 반대하던 상황은 눈곱만큼조차 반영되지 않았다. 이로써 서슬 퍼렇던 대통령의 의지는 영혼 없는 공무원들의 도움을 통해 여과없이 국민들에게 고스란히 닿게 되는 비극적인 상황을 초래하고 말았다. 

 

ⓒ뉴스1

 

백 번 천 번을 양보하여 국정화가 옳다고 쳐보자.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어떻게 이렇듯 막무가내 방식으로 국가 정책을 처리할 수 있는 것인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비록 거창한 소통 방식은 아니어도 적어도 절차적으로 국민들을 설득하거나 이해시키려는 아주 작은 노력 따위의 성의라도 비쳤어야 하는 게 아닌가? 더구나 당신네들이 국정화를 관철시키기 위해 활용한 방식이란 무언가. 결국 우리 내부 안에 깊숙이 내재돼 있던 이념 갈등을 또 다시 끄집어내어 더욱 깊은 상처만 남겨놓은 꼴이 아니던가.

 

 

3일 언론을 통해 전해진 가수 이승환 씨에게 배달된 트윗 한 줄은 그야말로 경악스럽다 못해 치가 떨릴 정도다. 21세기적 상황에서 빨갱이라는 단어가 난무하고 있고, 이미 고인이 된 가수 신해철 씨를 향해 반국가 선동의 선봉에 섰던 종북 가수라 칭하는 막가파식 표현은 우리 사회의 갈등이 이미 최고조에 이르렀음을 증명하고 있는 핫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국정화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그동안 집권세력이 꺼내들었던 논리는 딱히 없거나 있다 해도 보잘 것 없다. 오로지 이념이라는 잣대를 통해 네편 내편으로 편가르기에만 혈안이 돼 있을 뿐 국민과 국가에 대한 염려와 걱정은 애시당초 없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이 김일성 주체사상을 배우고 있습니다"란 새누리당의 플래카드는 이번 국정화 관철 과정에서의 가장 상징적인 모습으로 꼽힌다. 이념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일종의 신호탄이었다. 아울러 국정화 관철을 위한 그들의 핵심 전략이 그 안에 온전히 숨겨져 있다는 것 또한 주지의 사실이다. 이후 그들은 국정화 반대 행동을 두고 북한 지령에 의한 움직임이라는 보다 결정적인 카드를 꺼내들고 만다. 물론 설마 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여지없는 그들의 행동을 보며 왜 아닐까 싶어 아연실색했을 정도다.



“국정화 반대운동에 북의 지령이 있다 하니 수사해야 한다”고 말하던 친박계의 좌장 서청원 최고위원의 발언은 그야말로 섬뜩하기 짝이 없다. “검정교과서 옹호는 북한의 적화통일에 대비한 좌편향 교육을 시키자는 것”이라는 친박계 핵심 이정현 최고위원의 색깔론은 한 술 더 뜨며 어느덧 섬뜩함의 정점을 찍는 모양새다. 결국 새누리당의 플래카드로부터 시작하여 이들의 발언까지, 일관된 움직임은 오늘날의 이념 갈등을 극으로 치닫게 하는 일등공신 역할을 톡톡히 한다. 물론 의도적인 행위이다.

 

집권세력의 이념 갈등을 부추기는 이러한 망동은 반대세력에게는 반발을 불러올지언정, 그 반대급부로 자신들의 지지세력으로부터는 세를 결집시키는 극적인 효과를 낳으며 사회의 고질적인 갈등의 골을 더욱 깊게 한다. 대학교 학내에서 학회 주최로 열린 역사교과서 국정화 철회 공동성명 자리에 공교육살리기학부모연합과 고엽제전우회 등 자칭 애국보수단체 회원들이 난입하여 몸싸움을 벌이거나 심지어 지팡이를 휘두르는 등 난동을 부린 사건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내적 갈등의 외연적 확대를 의미한다. 지난달 26일엔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TF를 놓고 야당 국회의원들과 경찰이 대치를 벌이는 가운데 인근에서 관련 집회를 열던 어버이연합 회원이 현직 혜화경찰서장을 폭행하는 결코 웃을 수 없는 사건마저 불거졌다.

 

ⓒ뉴스1

ⓒ오마이뉴스

 

온라인에선 때아닌 이념 논쟁이 불을 뿜으며, '좌빨' '빨갱이' 등 20세기형 저급한 단어가 난무한 채 또 다시 우리 사회가 둘로 양분되는 안타까운 현상을 빚고 있다. 국정화의 당위성에 대한 논리로 꺼내든 집권세력의 이념 카드는, 제아무리 국정화가 구국의 결단일 만큼 대단한 업적이라고 가정하더라도, 물론 그럴 리는 추호도 없지만, 가뜩이나 남과 북으로 갈라진 이 나라를 또 다시 둘로 양분해 놓는 결과를 낳고 있기에 심각한 상황이 아닐 수 없으며, 때문에 비난 받아 마땅하다.

 

이러한 방식으로 관철시킨 국정화는 사회의 갈등을 최고조로 높이며 현재보다 미래에 벌어질 사안들에 대해 사회적 불안감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는 모양새다. 국민대통합위원회를 별도로 둘 만큼 사회 통합에 관심을 보였던 박근혜 대통령이거늘, 어쩌다 통합을 저해하면서까지 우리 사회를 최악의 갈등 구조로 만들어 놓은 것인지 보면 볼수록 참으로 한심하고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국정화 이슈가 할퀴고 간 우리 사회, 결국 남은 건 사회 갈등뿐이지 않은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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